“우리는 어딜 가나 특이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체르노빌 사람들’, ‘체르노빌 어린이’, ‘체르노빌 피난민”이라며 배척당했다. 나는 어린 딸을 데리고 민스크에 사는 여동생 집으로 찾아갔다. 동생은 모유를 먹이며 아기를 키우고 있었는데, 우리를 집안으로 못 들어오게 했다. 딸과 나는 기차역에서 잤다”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가 쓴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책은 1986년 4월 26일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로 벨라루스 공화국 내 485개 마을이 방사능에 심하게 오염되면서 주민들이 강제로 퇴거되었을 때의 상황을 증언을 모아 구성한 비극적인 이야기다.
오래전에 읽었던 이 에피소드가 문득 생각난 것은 중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환자 발생지인 우한(武漢)지역에서 탈출 귀국하는 한국인을 위한 격리시설 설치를 놓고 큰 사회적 논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다. 정부는 지난달 28일 관계 장관 회의를 열고 유학생을 포함한 우한 거주 한국인 700여명을 귀국시켜 증상 잠복기인 14일 동안 격리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마땅한 조치였다. 그러나 사실 미국과 일본에 비해 준비도 실행도 굼떴다.
가장 큰 문제는 격리 수용시설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일이었다. 처음에 정부는 귀국자들을 충남 천안의 공무원 교육시설과 청소년수련원에 수용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 같다. 이런 얘기가 보도되자 천안 주민들이 반발하고 시위까지 벌이는 사태가 일어났고, 유권자를 의식하는 지자체가 반대했다. 정부가 최종적으로 결정한 격리시설은 충남 아산의 경찰인재개발원과 충북 진천의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이다. 이들 두 지역 주민들도 트랙터 시위를 벌이며 반대한 것은 천안의 반대 시위를 생각할 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한 교민 367명을 실은 전세기가 지난달 31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들 교민들은 김포공항에서 검역 절차를 거쳐 증상이 발견되지 않은 사람 모두 아산과 진천 격리시설로 이송되어 수용됐다. 공항 검역과정에서 의심 증상이 발견된 사람은 국가지정 병원에 이송됐다. 데모를 하던 아산지역 주민들도 우한에서 전세기가 이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 해산했다니 다행이다.
우한 바이러스 사태를 보며 한국 정부의 재난대응 체계가 몇 단계 개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드러난 격리수용시설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다. 21세기에 들어서만 해외에서 발생한 전염질환이 사스, 메르스에 이어 이번이 3번째다. 일이 벌어질 때마다 정부가 논쟁을 일으키며 격리수용시설을 선정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지금은 기후변화의 시대이고 세계화와 사회관계망(SNS)이 구축된 초연결 사회다. 상상하지 못했던 자연재앙과 질병이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한 예방과 대응이 점점 급박해지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 공공시설을 검역격리 및 재난 대피시설로 어떻게 쓸 것인지를 미리 그곳 지역사회의 동의를 얻어 정해놓을 필요가 있다.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정하려면 격렬한 주민의 반발과 더불어 정치적 논쟁을 유발하게 된다. 이번 격리수용소 선정을 놓고도 여권지역과 야권지역 논쟁이 있지 않았는가. 민주주의 국가에선 여야가 절대 필요하지만, 수용시설물을 놓고 여야가 갈리는 일은 피해야 할 논쟁이다.
예부터 역병이 돌면 소문과 괴담이 판을 쳐왔다.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전염병은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사가 걸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포심리를 유발하기 마련이다.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스마트폰 하나에 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미디어 환경이다. 정부가 제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태의 진전에 따라 체계적으로 또 진지하게 대처해서 신뢰감을 얻어야 한다.
검역이라면 해외여행에서 돌아올 때 열감지기를 통과하는 절차만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것도 검역의 일부이지만 원래의 개념은 전염질환에 노출된 사람들을 일정기간 격리해서 관찰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격리시설 주민들도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감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우리 지역에 격리하는 것이 못마땅할 수 있지만 그게 오히려 감염환자가 나와 가족과 동네사람들과 접촉할 기회를 줄일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