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회사 ㈜KSS의 창립 50주년 행사가 지난 3일 저녁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렸다. KSS가 종업원들에게도 배당 개념의 보상, 즉 ‘이익공유제’를 실행하고 있다는 설명을 설립자 박종규 명예회장으로부터 들은 바 있어, 박 회장의 전화 초청을 받고 이 기념식에 구경 갔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행운권은 나를 피해 달아났지만, 그날 밤 내 눈에 명멸했던 동영상 속의 2개의 숫자와 젊은 보컬그룹이 부른 흘러간 발라드 한 곡이 매우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는다. 숫자는 ‘50’과 ‘300’이고, 팝송은 프랭크 시내트라의 히트곡 ‘마이웨이’(My Way)다.
50은 말할 필요도 없이 KSS창립 50주년을 상징하는 숫자다. 300은 오래오래 장수하는 기업이 되겠다는 캠페인성 모토다. 1969년 섣달 그믐날 허름한 빌딩의 10여 평 방을 얻어 초라하게 창립한 KSS가 50년이 지난 지금 임직원 500명이 LPG 운반선 등 26척의 선박을 운영하여 연 매출액 2,000억 원과 영업이익 470억 원을 올리는 탄탄한 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글로벌 경영 시대에 매출액 규모가 작아 보이지만 해운회사의 관점에서 보면 놀라운 실적이라고 한다. 특히 몇 년 전 한국의 대형 해운회사들이 경영부실로 줄줄이 도산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KSS는 돋보이는 강소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날 KSS 창립 50주년에서 강조된 것은 경영실적이 아니라 경영방식이었다. KSS는 정관을 고쳐 2014년부터 보너스(상여금)제도를 없애고, 결산 후 순익에 기초하여 주주배당뿐만 아니라 ‘임직원배당’을 실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경영방식을 도입한 사람은 창업자이자 대주주인 박종규 명예회장이다. 그는 2004년 회사경영에서 은퇴하면서 3명의 아들이 있음에도 가족 경영 세습의 고리를 끊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으며, 2014년 임직원배당제도를 도입했다.
다행히 전문경영인체제와 임직원배당제도는 성공적이었다. 임직원들의 근무태도에 주인의식과 창의력이 배어들었고, 기업경영이 투명해졌고, 선박 사고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경영실적이 좋아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고 임직원들은 1,000%의 보너스에 해당하는 배당을 받았다. 박 회장은 이런 긍정적 변화는 자신이 경영일선에서 퇴임한 이후에 일어났다고 강조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창업자 박 회장의 자본주의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날 기념식에서 ‘새로운 자본주의를 향하여’라는 연설을 했다. 그는 ‘임직원배당’ 제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은 생명에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조직에 들어가 일하는 것은 인생투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까운 인생을 그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투자하고 돈 없는 사람은 노동으로 투자합니다. 그러니 종업원이 주주와 같은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노동을 비용으로만 보지 말고 투자로 보자는 것입니다”
박 회장은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처절한 반성을 촉구했다. 그는 칼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먹고살 만큼만 임금을 주고 노동자가 일한 만큼 주지 않는다. 그 차액을 자본가가 착취한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계급투쟁으로 노동자 독재는 허용되어야 한다”라는 부분을 거론했다. 그는 AI 등장으로 자본의 공헌도가 산업혁명초기에 비해 커질 수 있지만 자본과 노동이 결합해야 이익창출이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자본가의 이익착취분의 일부를 노동자 측에 제공한다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의 근거가 없어질 것이 아니겠느냐는 게 박 회장의 생각이다.
수구적 주주자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박 회장의 논리는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와 정직이 살아 숨 쉬는 자본주의를 지키지 못하면 결국 자본가도 노동자도 설 땅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위기감과 애착심이 결합해 있는 탓이 아닐까.
박 회장이 주장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들으면서, 실리콘밸리의 기업인 마크 베니오프가 주장하는 ‘색다른 자본주의’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1999년 소프트웨어 플랫폼 기업 세일즈포스(Salesforce)를 창업하여 매출액 132억 달러를 올리며 개인자산 69억 달러를 가진 부자다.
베니오프는 지난 10월14일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우리에겐 색다른 자본주의가 필요하다'는 칼럼에서 “회사가 사회로부터 취해가기만 하지 말고 사회에 되돌려주고 긍정적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공정하고 평등하고 지속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베니오프는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회사 경영자는 주주 이익을 넘어 이해당사자의 이익을 바라보는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이해 당사자란 종업원, 소비자, 이웃공동체 그리고 지구환경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요즘 주주자본주의와 부의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도 ‘창조적 자본주의’를 주창해서 주목을 끌었다. 그는 자본주의가 부를 창출했지만 이 세계는 자본주의 혜택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스스로 창조적 자본주의를 실행하는 방법으로 ‘멜린다&게이츠’ 재단을 만들어 세계의 소외계층에 의료혜택 등을 제공하는 자선적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4차산업혁명의 발달로 대두되는 문제 중 하나가 중산층 붕괴다. KSS의 실적이 좋아지고 임직원 공유제가 잘 정착된다면 KSS만은 중산층을 보호하는 순기능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원 밀수가 없는 회사, 비자금과 리베이트가 없는 회사, 회계가 투명한 회사, 경영권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체제에 맡기는 회사, 임직원 배당제를 도입한 회사는 바로 KSS 50년의 역사다. 듣기는 좋지만 갈등과 고뇌와 압력이 점철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보통 기업인들은 하지 못하거나 하기 싫은 일들이었다.
기념식 공연에 보컬그룹이 부른 ‘마이 웨이’는 아름다운 멜로디도 좋았지만 “I did it my way’라는 가사 구절이 KSS와 창업자의 역사를 절절히 묻어내는 듯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했다오”, 개발시대를 살아온 기업인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구절이겠지만, 박종규 회장의 감회는 더욱 남다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