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이 오고야 말았다. 올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바야흐로 2020년대가 시작했다. 내가 처음 맞이하는 일 년, 내가 운명적으로 견뎌내야 하는 십 년의 첫날을 보고 싶었다.
1월 1일 아침, 새벽에 일어났다. 나의 충직한 머슴인 자명종의 울림이 아니라, 내 심연 깊은 곳에서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최선(最善)이 나를 잠에서 깨웠다. 아침 기상은 언제나 희망(希望)이다. 희망은 내가 오늘 오감으로 경험할 세계를 넘어선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삶의 원동력이다.
나는 새해 첫날 아침, 2019년과 질적으로 다른 시간을 보내겠다는 믿음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눈이 저절로 떠졌다.
하루를 일 년으로 여긴다면, 새벽은 하루의 중요한 계절이다. 새벽은 나의 ‘잠’을 깨운다. 나는 새벽에 공부방 하얀 방석에 좌정해, 아침을 알리는 별인 태양(太陽)의 미명을 보고 싶었다. 일출의 빛줄기를 보려고 마당에 나갔다. 어제부터 내린 가루눈이 제법 쌓였다. 영하 10도 날씨가 나를 움츠리게 만든다. 올해 첫 빛줄기를 맞이하기 위해, 마당 한쪽에서 나의 등반을 언제나 기다리는 검은 고동색 빛깔의 편편한 바위 위에 올랐다. 아쉽게도 새해 아침 하늘엔 회색 구름이 잔뜩 끼어 신정 태양의 윤곽만 구름 너머 잠시 보여줄 뿐이다.
나는 오늘도 언제나 나에게 보람을 선물해 주는 거룩한 의례로 시작했다. 아침명상을 위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올해는 내가 해야만 하는 것, 즉 인생의 임무이자 삶의 정수만을 실행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눈을 뜨니, 동반 수련자들인 반려견들이 나에게 알린다. 이젠 걷기 훈련시간이다.
나는 반려견들과 안개 낀 찬 공기를 헤치며 산책(散策)에 나섰다. 인간은 의도적인 훈련을 통한 얻은, 습관을 통해서만 서서히 변화한다.
그 의도는 어제의 자신으로부터 탈출해 미래의 자신을 지금 여기에서 창조하겠다는 결심이다. 그것은 더 나은 자신과의 경쟁일 때만 선하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비롯된 의도는 악하기 때문에 지속할 수 없고, 자신의 자산이 될 수도 없다. 자연은 아침산책을 통해 언제나 한 가지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간결(簡潔)한 삶이다. 위대한 예술작품에 불필요한 선이나 음이 없다. 원활한 기계에 거추장스러운 부품이 존재할 수 없다.
감동적인 시가 쓸데없는 단어나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루라는 시간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한 대원칙은 간결이다. 오늘은 사실 어제와 다르지 않다.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일 뿐이다. 오늘이 어제와 다른 이유는, 오늘은 어제와 달라야만 한다는 내 생각이며, 오늘을 최선의 예술작품을 만들겠다는 마음가짐 때문이다.
지난 십 년이 그렇게 지나갔듯이, 지난 일 년이 순간이듯이, 2020년도 그렇게 지나가도록 방치할 것인가?
반려견들과 함께 집 앞 북한강을 따라 한참 달려, 야산(野山)으로 진입했다. 이 산으로 들어갈 때마다, 누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약간의 공포를 느낀다.
오랫동안 버려진 건물 두채가 있고 언덕에는 누군가 휴양지로 사용했던 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아마도 지난 몇 년 동안 야생동물들의 보금자리였을 것이다. 우리가 이 산에 진입했는지, 이곳의 주인인 야생동물들이 알아챌 것이다. 그 옛날 메소포티미아의 영웅 길가메시와 그의 단짝 엔키두가, 신에게 도전하기 위해 무모한 원정에 나선다. 그들은 신전과 왕궁 건축에 사용되는 나무인 백향목을 지키는 후와와를 살해하러, 레바논 백향목 숲으로 들어간다.
후와와는 신들을 대신해 이 영험한 산을 지키는 괴물이다. 야생에서 살던 반인반수인 엔키두는 말한다. 후와와는 산에 진입하는 모든 동물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기 때문에, 그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발자국 소리가 오늘 특히 크게 울렸다. ‘사각사각’하고 낙엽 밟는 소리가 야산전체에 울려 퍼졌다. 건조하고 찬 공기가 야산 흙을 변모시켰다. 습기를 머금은 홍토 흙이 혹한의 모진 서리로 변해 뾰족한 육각형 소형 건물모양이 됐다. 그 생김새가 SF 영화에 등장하는 우주선처럼 기상천외하다.
내가 발을 옮길 때마다, 거대한 건물들이 ‘우지직 우지직 소리’를 내면 무너진다. 그 위에 침엽수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가루눈까지 덮였다.
우리는 걸으면서 우리가 이 야산에 진입하고 있다고 새들과 동물들에게 의도치 않게 알렸다. 산책의 반환점인 강가 선착장으로 가는 길 옆에 꿩 깃털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선혈을 머금은 앙상한 가슴뼈는 지난밤 이곳에서 난폭한 싸움이 있었다고 말한다. 고요한 장소 같지만, 사실은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의 현장이다.
야산을 넘어 오솔길을 200m 정도 따라가면, 선착장이 나온다. 야산과 선착장을 이은 갑판을 거쳐 오목모양 갑판으로 올라섰다. 내가 올라가니 갑판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그것과 붙어 있던 얼음이 균열되면서 호수물이 올라와 잉크가 번지는 것처럼, 그 주변을 녹였다.
나는 2020년,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한다면, 선착장까지 온 내 발걸음은 헛수고다.
나는 가야만 하는 그곳을 나는 알고 있는가? 나는 지금 그곳을 향해 있는가?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상기한다.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 시인 라비아 알-바스리(Rabi'a al-Basri, 717–801)는 말한다. 그녀는 이라크의 남쪽 항구 바스라에서 8세기에 태어나 일생을 홀로 살면서 사막에서 명상을 수련했다.
그의 시는 이렇다. 나는 그의 시에 ‘묵상’이란 제목을 붙였다.
형제-자매 여러분,
저의 평안은 저의 고독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흠모하는 그분과
항상 함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랑을 대치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 살면서 시험입니다.
제가 그분의 아름다움을 묵상할 때마다
그분은 저의 ‘미흐라브’가 되고
그를 향해 서는 것이 저의
‘끼블라’ 입니다.
‘미흐라브(mihrab)’는 모스크 안에 있는 조그만 제단으로, 메카를 향한 가짜 문을 지은 구조물이다. 미흐라브는 실제 장소가 아니라, 자신이 가야만 하는 그 장소로 들어가는 영적인 문이다.
무슬림들은 어느 건물에나 메카로 향하는 화살표 표시를 한다. 이 화살표를 아랍어로 ‘끼블라(qiblah)’라고 부른다. 끼블라는 자신이 가야 할 장소를 향해 마음의 태엽을 감는 행위다.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
2020년이란 배를 타고 내가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해 항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