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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욜로은퇴] 은퇴란 무엇인가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10.10 18:59 수정 2019.10.10 18:59

김 경 록 소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은퇴(隱退)라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전(辭典)적 의미는 직업이나 일의 ‘종결’을 의미하니 뒷방 늙은이가 되는 듯한 뉘앙스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은퇴라는 말 대신 부분적 은퇴 혹은 반퇴(半退)라는 말을 씁니다. 반만 물러나고 반은 발을 걸쳐 있자는 뜻이죠. 은퇴 관련 기관도 이 단어를 기피하고 다른 이름을 붙입니다. 경제 관련 연구소는 이름이 다들 비슷한데 유독 은퇴관련 연구소는 제각각 다양한 이름을 쓰고 있는 이유입니다. 은퇴는 정말 이런 의미일까요?
은퇴는 늙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생애에 걸쳐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2014년에는 두 명의 스포츠 스타가 은퇴를 했습니다. 축구선수 박지성이 33세 나이에 은퇴를 했고 피겨스케이팅 김연아 선수 역시 24세 나이로 은퇴합니다. 젊은 조폭도 ‘그만 손 씻고 이 바닥에서 은퇴하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은퇴는 자신의 주된 일터에서 물러나는 것일 따름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젊어서 은퇴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면서 나이 들어 은퇴하는 것은 단어조차 직시하려지않으려는 것은 그것을 마지막이라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퇴는 ‘~에서’ 은퇴하는 것입니다. 판사 일에서 은퇴하거나 의사 일을 은퇴하거나 정년 가까워져 직장에서 은퇴합니다. 하지만 ‘~에서’ 물러나는데 그치지 않고 ‘~로’ 옮깁니다. 판사 일에서 물러나서 변호사 일을 한다든지 혹은 병원 일에서 물러나 아프리카로 떠날 수도 있습니다. 은퇴는 ‘인생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은퇴했다’라는 말보다는 ‘나는 어떤 일에서 은퇴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합니다. 전자의 은퇴는 그 자체로 종결의 의미가 있지만 후자의 은퇴는 A에서 B로 옮겨 가는 과정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은퇴(retire)를 ‘타이어를 새로 바꾼다’는 re-tire로 해석하는 것도 A에서 B로 옮겨 가는 과정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은퇴가 부정적으로 쓰이는 건 한자 뜻 때문일 겁니다. 은퇴를 직역하자면 숨을 은(隱), 물러날 퇴(退)이니 물러나 숨는다는 뜻이거든요. 일본에서는 인타이(引退)라고 하는 데 그냥 ‘물러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물러나 숨는다는 뜻 다시 말해 철저하게 물러난다는 뜻의 은퇴를 쓰게 된 건 우리 선조들의 독특한 행동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선비들은 숨는 것(隱)을 좋아했습니다. 입신양명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다 나이가 들면 조정에 물러나겠다고 하고 세속을 벗어납니다. 이런 유전자가 있다 보니 우리도 툭하면 ‘산에나 들어갈까’라는 말을 합니다. 저녁 자리에서 지인이 지금의 임기가 끝나면 한 달 정도 아이슬란드나 사막으로 가서 철저히 숨고 싶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하지만, 선조들은 숨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숨어서 술 마시고 노래하거나 그냥 칩거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고 난(蘭)을 치고 사색을 하고 자기 수양을 합니다. 선조들에게 은퇴는 세상에서 물러나 나를 찾는 기간이었습니다. 물러나 숨는 것은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었을 따름입니다. 목적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나를 돌아보는 기간이었습니다.
영국 소설가 겸 극작가인 서머셋 몸(Somerset Maugham)이 1919년에 출간한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지금은 100펜스가 1파운드이지만 과거에는 12펜스가 1실링이고 20실링이 1파운드였습니다. 6펜스는 1펜스 6개가 아니라 동전 하나입니다. 우리나라 500원 동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것도 둥그런 것이요 6펜스도 둥그런 것입니다. 어떤 둥그런 것을 추구하겠느냐는 물음의 소설입니다.
달은 이상을, 6펜스는 현실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항상 이 갈등 속에 있습니다. 철학자 탈레스가 하늘을 관찰하다가 개울에 빠졌다는 일화가 유명한 것도 사람의 내면에는 그 갈등이 상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본 지도를 제작한 에도 시대의 이노 다다타카(1745~1818)는 50세에 평생의 업인 장사를 아들에게 물려 주고 늦은 나이에 천문학을 공부하여 73세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노즈(伊能圖)라는 일본 전역 지도를 완성하게 됩니다.
6펜스는 나를 포기하는 것이라면 달은 나를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노 다다타카는 젊어서 6펜스 동전을 쥐고 있다가 나이 들어 달을 찾아나선 것입니다.
은퇴는 늘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물러나 숨는 것은 새로운 나아감을 위한 준비입니다. 노년의 은퇴는 젊을 때와 달리 새로운 나아감에 제약이 많다 보니 다른 차원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새로운 나아감을 위한 준비라는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은퇴라는 단어를 외면해도 인생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단어에 우리 민족의 삶의 과정에 대한 관점이 담겨 있을지 모릅니다. 몸과 마음을 완전히 물린 뒤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기간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대충 뒤로 물러나지 않고 철저히(隱) 물러난 뒤(退) 다음을 준비했습니다.
이제 은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해야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시간에 대해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그것을 아는 것 같지만, 막상 누가 물으면 말문이 막힌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은퇴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감히 답을 해 봅니다.
은퇴란 A에서 B로 옮겨 가는 과정입니다. 여러 번 있을 수도 있고 두세 번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나이와도 관계 없습니다. 삶의 종료도 아닙니다. 은퇴는 연극의 막간처럼 삶의 과정에 있는 막간이며 이 막간들이 삶을 만들어갑니다. 은퇴가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발전적 과정인 이유입니다.
대충 쉬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일에서 철저히 물러나 새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은퇴는 6펜스보다는 달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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