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컴퓨터 공학자 바이첸바움(Joseph Weizenbaum)은 1966년에 대화를 하는 로봇인 채터봇(chatterbot)을 개발했습니다. 이름이 일라이자(Eliza)였는데 심리 치료용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채터봇은 환자의 말을 질문으로 바꾸어 말하는 극히 단순한 알고리즘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김경록입니다’ 라고 메시지를 보내면 ‘당신은 김경록이군요’라고 로봇이 답을 하는 겁니다. ‘제 친구가 선물을 주었어요’라고 하면 ‘당신 친구가 선물을 주었다고요?’라고 답이 오는 식입니다.
일라이자 알고리즘은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공감하는 시늉만 냈습니다만, 상대방은 일라이저를 진짜 의사로 믿거나 실질적인 치료 효과도 보였습니다. 심지어 일라이저가 알고리즘이라는 걸 아는 사람도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한 것에 대해 반응만 와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초기의 채터봇이 인공지능으로 진화한 모습이 2013년 개봉한 영화 ‘허(Her)’에 나오는 사만다라는 알고리즘입니다. 편지를 대필해주는 인간 주인공이 채터봇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는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일라이저의 단순하고 바보 같은 대화는 연인 사이의 대화와 유사합니다. 연인들은 주로 ‘사랑해’, ‘나도 사랑해’, ‘진짜?’, ‘진짜!’와 같은 말만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대화를 ‘교화(交話)적 기능’이라 하는데, 메시지의 접촉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는 대화가 정보교환을 위한 게 아니라 상대방의 메시지를 받았고 그리고 내가 빠짐없이 잘 듣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능입니다. 말의 교환 기능인 셈이죠. 이런 대화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 사이에서 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엄마와 아기 사이도 이런 대화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대화는 의미가 있는 정보를 교환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회사 회의에서 행해지는 대화는 정보를 교환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방편입니다. 옛 어른들이 쓸데 없는 말 많이 하지 말라는 건 정보교환이라는 실용적인 목적의 대화 이외는 자제하라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대화는 정보 교환의 기능보다는 대단한 의미를 두지 않고 그냥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교화적 기능’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도 듭니다. 수다도 그 범주 중 하나입니다.
얼마 전, 대담 중에 정신과 전문의 이근후 교수님이 남자들도 수다를 떨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수다는 정신 질환 치료뿐 아니라 불면증 치료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대뜸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유전적으로 좀 다른 것 같은데 남자들은 수다보다 몰입을 통해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분해하고 조립하거나 복잡한 블록을 쌓거나 무얼 만드느라 몰입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대답인즉, 남자 여자의 선입관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남자도 수다 버릇하면 되고 또 정신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되니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은 OECD 평균의 3배에 이를 정도로 높습니다.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여전히 OECD에서 압도적인 1위입니다. 원인은 경제적 빈곤과 건강의 문제가 60% 정도를 차지하지만 불화와 같은 정서적인 문제도 40%에 이릅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자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해 본 사람 중 배우자가 있는 사람은 5%에 불과하고 70%가 미혼, 이혼, 사별, 별거와 같이 배우자가 없는 경우였습니다.
저는 배우자가 없는 비율이 높은 이유를 ‘교화적 기능’의 대화를 할 상대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부부 간에 한 명이 ‘나 오늘 정말 피곤해’라고 말했을 때 ‘그래? 얼마나 피곤한데?’라고 반응해줘도 정서적 스트레스는 많이 해소됩니다.
제 세대에서 자녀 유학을 위해 아내와 자녀를 해외에 보내고 혼자 지내는 ‘기러기’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기러기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TV를 향해 말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이 TV에게 뭐라 중얼중얼하는 것을 보고 자칫하면 이러다 미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친구의 아내가 돌아오면서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여러분은 주변에 교화적 기능의 대화를 할 사람이 얼마나 있나요? 저는 명절 때 12시간 이상 차를 몰고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고향에 도착하면 대개 새벽 두 시 정도인데 몸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습니다. 초인종을 누르면 아버지가 문을 열고 ‘경록이 왔나’라고 맞아주셨습니다. 제가 눈앞에 이미 와 있는 데 왔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말이 좋았습니다. 아쉽게도, 나이가 들면서 이런 대화를 해 주는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교화적 기능’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옆에 많이 있는 게 좋습니다. 배우자, 친구, 자녀들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도 ‘교화적 기능’의 대화를 나누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보만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공감도 못지 않게 큰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장자(莊子)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쓸모 없어 보이는 게 쓸모가 있다는 뜻입니다. 원자의 세계에도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 엄청나게 큰 쓸모없는 공간이 있지만 이 공간이 있기에 전자의 움직임이 가능합니다. 광대한 우주 공간이 있었기에 지구가 운석에 박살 나지 않고 생명이 보존되었는지 모릅니다. 쓸모 없어 보이는 대화가 더 쓸모 있을 수 있습니다. 곁에 있는 배우자와 함께 쓸모없어 보이는 ‘교화적 기능’의 대화를 나누는 게 노후 행복의 출발점일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