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단에서 가장 주요한 월간 시잡지가 시문학임은 확실하다. 1971년 7월에 시문학이 창간호를 내고 월간시문학은 49년이 넘도록 한 번도 결호를 낸 일이 없어, 반세기 긴 세월에 그야말로 롱런(Long Run) 정진하고 있다.
왕대밭에 왕대가 난다는 우리나라 격언이 엄존하지만 1970년대(代) 당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월간 문예잡지던 ‘현대문학’(1955년 창간)이 ‘시문학’이란 옥동자(玉童子)를 오랜 진통 끝에 탄생시켰다. ‘시문학’은 당시 ‘현대문학’의 산모요, 실세인 조연현 주간이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고, 김수명 현대문학 편집장도 중요한 일조(一助)를 했고, 시인·평론가 문덕수교수가 시문학에 깊이 관여하다가 현대문학사에 ‘시문학’을 분가(分家)시켜 ‘시문학’을 ‘현대문학’에 버금가는 멋진 시문학잡지로 가꾸어 유능한 신진시인들이 대량 배출되어 한국문학발전의 원류로 용솟고 있다.
시문학창간호를 보면 주요필자가 서정주/박두진/김현승/문덕수/김광섭/ 신석초/신동집/홍윤기/이헌구/김동리 外 37人이나 된다. 책의 분량은 국판 102쪽으로 독자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가장 쾌적한 볼륨이란 느낌이 든다. 시조로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예에 당선됐지만, 나의 자유분방한 문학정신을 정형시에 가둘 수가 없어, 김수명 현대문학편집장님과 진지한 상담을 거쳐 자유시로 전환하게 됐고, 마침 필자(김시종)의 자유시 2편을 시문학창간호에 실어주셔서, 자유시에 전심전력을 기울여, 자타가 공인하는 자유시인으로 예술적 소명을 다하고 있다.
필자를 보다 나은 길로 인도해주신 김수명 편집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 생활찬가 / 김시종
오두막집이라도/ 남의 집 말고, 내 집에서
스테리오 전축이 아니라/ 야외전축이라도 좋다./ 하루라도.
비숍의 ‘스윗홈’을 듣는 날이/ 꼭 있길 빌었다.
// 오늘저녁은 나의 집에서/ 전축에 양판을 걸고,
/어머니랑 ‘스윗홈’(즐거운 나의 집)을 듣는다.
‘스윗홈’이 끝나고/ ‘매기의 추억’이 나에게 윙크한다.
//이젠 시원한 아가씨의/ 부군(夫君)이 되고 싶다.
미니스커트도 좋고/ 긴 치마를 입었으면 어떠랴.
//볼 붉은 아내가 빚은 쑥떡을/
다정한 이들끼리/ 쑥덕거리며 각별히 나뉘고 싶다.
//나의 욕망도 위정자처럼 거창하다./ 아무리 애써 채워도
채울수록 더 공허가 커진다.
//사람 사는 세상에/ 재미가 날마다 억수로 샘솟기야 하랴?
//큰 걱정거리 없으면/ 무던히 깨를 쏟는/ 미쁜 오늘이어라.
(시) 신(神)의 기국(碁局) / 김시종
반점(얼룩점)은/ 신(神)의 바둑./ 작년엔/ 코에 한 점.
올해는/ 등에 한 점./ 신(神)은 수를/ 천천히 놓지만
녹동행(소록도)버스는/ 얼룩 소들로/ 늘 만원이다.
<시문학 창간호(1971년 7월호) 게재>
·덧말 → 시문학 창간호에 실린 ‘생활찬가’는 만 30년을 지나서, ‘공무원문학’잡지가 시행하는 제1회 공무원문학상(2001년) 저작상을 받게 됐을 때, 수상작(受賞作)으로 뽑혀 더욱 감명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