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여름은 화끈하게 더워 벼농사를 잘되게 해 이밥(쌀밥)을 배불리 먹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내가 말이야 그럴듯하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가장 더운 달인 8월을 지내느라고 몸에 발진이 돋고, 입술과 코 밑이 헐고 경을 치렀다. 나는 천성이 시인이 되어 시집을 읽으면서 더위를 달랬다.
운 좋게 손에 잡힌 시집이 ‘가고파’(이은상)였다. 시집 ‘가고파’를 읽다가 명시 ‘천지송(天地頌)’이 내 눈길을 사고 잡았다.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이다. 젊어서 좋은 사람을 만나면 감명을 받아 쓸모 있는 인격자가 되고 어려서 좋은 책을 만나 감동을 받으면 문사(文士)도 되고 대학자도 될 수 있다.
필자는 20대 초반에 문재(文才)와 학덕(學德)을 다 갖추신 노산 이은상선생님과 뜻 깊은 만남이 이루어져 한생을 시와 수필을 지어 시집 42권을 펴내고 수필집도 4권을 펴내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
노산 이은상 선생님은 80세 되시던 1982년 가을에 긴 잠에 드셔서 서울 국립현충원 명사묘역에 모셔졌다. 생전에 노산 이은상스승님을 가까이 여러 차례 대면할 수 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큰 행운이라 생각하고 깊이 감사드린다.
노산 이은상 선생님께서는 천하대문장(天下大文章)으로, 저의 김시종 첫 시집 ‘오뉘’의 머리말을 내려 주셔서, 김시종 첫 시집은 머리말 하나만 해도 주요시집이 되고 남는다. 이은상 선생님은 제 둘째 시집 ‘청시(靑枾)’와 셋째시집 ‘불가사리’ 제목 글자(제자)를 직접 써주셨다. 이은상선생님은 대천재(大天才)요, 대문호(大文豪)로 시(시조)도 몇 백편의 명시(名詩)를 남기고, 장편 수필집 ‘무상(無常)’은 한국수필의 대표작이기도 하고, 국문학·사학논문도 남들이 흉내도 못 낼 만큼 기발하고 흥미 만점이다.
이은상 선생님의 명시 보물창고에서 가장 빛나는 대표작 ‘천지송’을 꺼내 애독자 제현과 같이 살펴볼까나?
천지송(天地頌) / 이은상(李殷相)
보라 저 울멍줄멍 높고 낮은 산줄기들
제마다 제 자리에 조용히 엎드렸다.
산과 물 어느 한 가지도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황금 방울같이 노오란 저녁해가
홍비단 무늬 속에 수를 놓고 있다.
저기 저 구름 한 장도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지금 저 들 밖에 / 밀려오는 고요한 황혼
오늘밤도 온 하늘에 / 보석별들이 반짝이리
그렇다 천지 자연이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1933. 5. 10. 동아일보 게재
<덧말> 발표 당시 서울 시내 큰 교회 목사님이 주일 낮 예배 설교시간에 낭독해, 우레 같은 성도들의 박수가 쏟아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