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무역갈등으로 400여 년 전의 이순신 장군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23전 23승의 명장 이순신은 세계 전쟁사에서도 손꼽히는 해군 지휘관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함대를 물리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는 한 기자의 질문에 “자신을 영국의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나 이순신에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말하며 “이순신이 나의 함대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전장에서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술가였던 이순신은 공직에서도 한치의 물러남이 없었다.
이순신이 종8품의 훈련원 봉사로 재직하던 당시, 병조정랑(정5품)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이순신에게 인사청탁을 하였으나 거절하여 좌천된 일화는 유명하다.
이순신이 하급관리 시절에는 집안 어른이기도 한 이조판서 율곡 이이가 만남을 청하였으나 거절하였던 일도 있다. 율곡 이이가 인사를 관장하는 중책에 있는 동안은 방문이 불가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렇듯 공직에서의 이순신은 공사를 엄격히 구분해 판단하고 한번 옳다는 신념을 세우면 이를 실천하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하급직에 대한 인사관리 기준도 청렴에서 출발하였다. 이순신은 능력 위주의 채용을 시행했으며 부하에 대한 공로평가 또한 공정함을 잃지 않았다.
공직자들은 많은 순간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원칙만을 고수하다 대의를 저버리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낭중지추의 꼿꼿함은 동료의 질시를 사기도 한다. 융통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고뇌의 순간, 이것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문제인지 신념을 지키기 위한 용기가 부족한 것인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신념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고 이를 지켜나가기는 더욱 어렵다.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순신은 수많은 고뇌의 순간마다 조국과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신념을 다지고 이를 실천했다.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이라는 치욕에도 강직함을 물리지 않은 이순신으로부터 용기와 청렴강직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