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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광복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하며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8.08 19:20 수정 2019.08.08 19:20

김 익 재 주무관
대구지방보훈청 보훈과

광복이란 우리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단어다. 일제로부터 억압받던 암흑기를 벗어나 잃었던 빛을 찾았다는 기쁨과 억압하던 요인들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채 하나의 민족국가가 되지 못한 아쉬움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은 6·25전쟁이란 시련으로 나타나 되찾은 빛을 짓밟기도 했지만 지금 대한국민은 경제규모 세계 12위, 언론자유지수 아시아 1위의 나라로 성장했다. 그렇기에 광복은 더 특별해 보인다.
작은 국토, 전무하다시피한 산업기반, 불안정한 정치상황에서 출발했지만 우리 힘으로도 이렇게 도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출발점이 광복이기 때문이다.
간혹 우리의 광복을 미국의 원폭에 의해 우연히 얻은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국과 그렇지 못한 류큐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두 국가 모두 전후 잠시 미국의 신탁통치 하에 있었고 한국은 독립해 자주국가가 되었지만 류큐는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이 한국을 더 좋게 봤기 때문일까? 국제정치나 외교 무대에서 그런 동정은 기대할 수 없다.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세계가 외교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제에 강제병합되기 전부터 국채보상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 같은 치열한 저항운동이 있었고, 강제병합 후에도 3·1운동으로 대표되는 독립운동과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옮겨가면서도 독립투쟁을 포기하기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의 노력이 있었기에 기어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강렬한 독립에 대한 염원은 미국도 막을 수 없었던 것. 반면 류큐에선 일부긴 했지만 일본 복귀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미국은 일본 치하로 돌아가겠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는 지역을 굳이 독립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1972년 류큐는 일본에 최종 반환되어 고유 국명을 잃고 오키나와 현이 되었다.
2019년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에서 일본산 소재의 한국 수출제재를 발표하며 경제공격을 시작했다. 한달 뒤인 8월 2일. 일본은 대한민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며 공격의 강도를 높였다. 민족의 역량을 결집해 극복해야할 난관이 100여년만에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밖으로부터 위협에 국가가 위기를 맞은 지금 다시 한번 광복이란 단어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자문해본다. 우리민족이 빛을 잃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민족이 빛을 되찾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 그 빛을 다시 잃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
답은 나와있다. 우리 선조들의 광복을 향한 불굴의 의지가 그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후손으로서 그들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그들의 의지를 이어받아야할 것이다.
일본의 한국 백색국가 제외날 긴급 국무회의에서 밝혀진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광복을 위해 혼을 불태운 선조들의 의지를 잇는 우리의 생각일 것이다.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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