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에서 일제와 싸운 항일투사들은 해방이 되면 바로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일제가 물러간 후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한반도는 새로운 외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항일투사들뿐만 아니라 나라의 온전한 독립을 바랐던 국민 모두가 망연자실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1945년 해방이 되자 바로 조선의용군 무정의 부관으로 선발대 1,500명과 함께 서울로 들어와 11월 조선국군준비대 전국대표자 대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분이 있었다. 크지 않은 키에 검은 얼굴, 말끝을 매섭게 맺는 언변, 그리고 온몸이 혁명에 젖어 있어 마치 혁명의 회신과도 같았던 김명시 여장군에 대해 되돌아보고자 한다.
김명시 투사는 경남 마산에서 국채보상운동과 의병활동이 한창이던 1907년에 태어났다.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김명시 투사는 서울로 올라가 배화고등여학교(현 배화여고)에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서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이 무렵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한반도에도 공산주의 이념이 한창이던 때라서 오빠 김형선은 마산에서 조선공산당 지부를 세우는 등 공산주의 이념 확산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1925년 7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한 김명시 투사는 그해 10월 고려공청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3년제인 이 대학의 모든 학비는 코민테른에서 부담하였지만 1년 반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유는 상해의 조선공산당 재건 책임자인 홍남표와 조봉암의 부름을 받아 상해 한인특별지부 조직의 선전업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임무 중에는 대만,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 식민지 국가의 운동가들을 규합해 동방피압박민족반자제동맹을 조직하는 것도 있었다.
이 임무가 끝나자 1929년 겨울에 홍남표와 함께 북만주로 갔다. 이 무렵 모스크바의 지침은 일국일당제였는데, 이에 따라 만주로 가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해체하고, 당원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라는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자신이 조직한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동맹의 집행위원으로서 기관지 ‘반일전선’ 제작을 주도하였고, 아성현에서는 아성현위원회를 조직해 부인부 책임과 청년단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마침 이때 국내에서는 대규모의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났다. 2천여 명 이상이 참여한 이 의거는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대일투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만주 지역 한인 학생들도 동맹휴학을 벌이며 반일투쟁에 나섰는데, 1930년 5월 김명시 투사도 300여 명의 조선인 무장대와 더불어 하얼빈 주둔 일본영사관을 공격하여 화염과 총성으로 뒤덮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상해로 들어와서는 박헌영과 함께 기관지를 잠시 제작하다가 국내로 파견되었다. 이 무렵 오빠 김형선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를 도우라는 이유에서였다. 인천에 도착한 김명시 투사는 제물포에 자리를 잡고, 공산당 기관지 ‘코뮤니스트’, 지하신문 ‘태평양노조’, 유인물 ‘붉은5·1절’ 등을 복사해 배포하는 활동을 했다. 또한 제사공장과 성냥공장 여성 노종자들을 조직하고 교육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느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배신자는 있기 마련이었다. 성냥공장 파업을 지도하던 중 동지의 배신으로 조직이 발각되어 만주로 피신하던 중 압록강 부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일본 경부가 김명시 투사를 체포하는 상황을 묘사한 ‘조선사상범 검거 실화집’을 보면, “어떤 농가의 문전에 어린애를 업고 사람들이 왕래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 연령 25·6세 가량 보이는 여자가 있었는데, 직감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엄밀하게 추궁한 즉, 모스크바 공산대학 졸업생, 조선공산당에 중국공산당 여성투사로서의 중진, 상해로부터 잠입한 김명시였다”라는 일경의 영웅담이 나와 있었다.
어린애를 업고 있는 주민처럼 가장했지만, 일제의 숨 막히는 감시는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조봉암, 홍남표 등 15명이나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는데, 김명시 투사도 6년을 선고받았지만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 감옥살이의 고통에 대해 조봉암은 ‘사상계’ 1958년 2월호에서 이렇게 표했다.
“추위 고생이 제일 컸다. 떨다가 떨다가 지쳐서 잠든 사이에 슬그머니 얼어 죽으면 네모난 궤짝 속에 넣어서 파묻었다. ··· 자고 일어나면 사방 벽면에 5부씩이나 될 만한 두께로 하얗게 성에가 슬어서 마치 사명당의 ‘사처방’ 같았다”
7년 만에 출옥하고는 곧장 중국으로 달려가 팔로군에 입대해서 천진, 제남, 북경, 태원 등지에서 활동을 하였다. 강서성 서금에서는 무정의 밀사를 만나 조선의용군에 합류하였고, 해방될 때까지 5년여 동안 조선독립동맹 화북책임자, 북경책임자로서 활약하였다. 해방 후에는 온전한 독립을 위해 공산계열에서 활동하던 중 1949년 10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이틀 만에 목을 매어 자살을 했다고 한다.
해방 후 ‘동아일보’ 기사에서 김명시 투사에 대해 ‘조선의 잔다르크 현대의 부랑인(부랑은 조선 인조 때의 여성으로, 말을 잘 타고, 병정놀이를 하면 우두머리를 하곤 했는데, 병약한 아버지를 위해 남장을 하고 입대한 후 초장까지 한 여장부), 연안서 온 여장군’이란 제목으로 관심을 끌 만큼의 독립투사였는데, 또 한 분의 투사가 이렇게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던 것이다. 오호, 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