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소감 - 봉 종 기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더니 잔인한 4월의 봄바람에 온 세상을 꽃비로 적시우는 나른한 오후... 하릴없이 모전천변을 거닐어 본다.
만개한 꽃, 꽃, 꽃들이 아름다움을 더해 주지만 반추해 보는 내 삶은 마른 풀처럼 삭아드는 현주소를 각인 시킨다.
한 문장을 쓰기위해 여러 날을 전전긍긍하던 때도, 표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젊은 날들도 배움을 주던 스승님들의 깨우침에서 사이다 같은 청량감을 느끼며 온갖 문학에 침잠된 적도 있었다.
한통의 전화가 왔다.
신춘문예 수필 당선소감을 보내라는 신문사 전화였다.
어설픈 글 솜씨라 더럭 걱정이 앞섰다. 또, 소감문을 어떻게 쓸까 하는 우려도 있지만 앞으로 짖꿎은 친구들이 ‘OOO작가’라고 불러대면 그 이름값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설익은 글 솜씨로 여기까지 온 것은 많은 이들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변 분들께 우선 감사드린다. 독서동아리 회원들, 친지들, 가족들... 특히, 졸작을 점정(點睛)해 주신 세명일보와 심사위원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당선작 - 진경이의 상처
진경이 표정이 순간 굳어지더니 얼굴 표정에서 많은 불편함이 교차되고 있었다.
진경은 내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입장이라 제자임은 틀림없다. 80년대 당시 나의 대학생활 때 야간에 혜인야학에서 사회과 교사로 자원봉사를 했다. 그 즈음 대구에는 섬유산업을 비롯한 크고 작은 공장들이 많아 10대 후반부터 2,30대의 공장노동자들이 도시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시절이다. 이 당시 어린 노동자들은 가정형편상 정규학교를 중단하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세상을 일찍 맞딱드린 입장들이었다.
수많은 노동자들 중에는 지난날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했거나 지적갈증을 느끼는 부류는 비록 공장일이 힘들고, 20대 전후의 나이 때가 그러하듯 놀고 싶은 욕구가 지배적이지만, 그래도 그런 유혹을 자제하고 시간을 쪼개서 야학의 문을 노크한다.
혜인야학은 중학과정 2개반 고교과정 2개반으로 학생 수가 꽤 많은 편이었다.
나는 고등부 담임으로 진경은 우리반 학생이었다. 스물세살의 진경은 공부도 곧잘 했으며 애교도 많고 붙임성이 있어 남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았고 교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나도 범생이에게 느끼는 관심을 기울여 주었고, 진경이도 다른 과목선생들 보다는 담임인 나를 잘 따라주며 공장생활과 야학공부를 잘 이어갔다. 그러그러하게 지내던 어느 날 진경은 무슨 이유인지 고향인 제주도 서귀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곤 몇 개의 계절이 바뀌고 내가 4학년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마침 지난날 배낭여행에서 만난 후배의 집이 서귀포라 대학친구 4명이 후배의 집에서 신세지기로 했다. 여행 중 진경에게 연락을 했더니 같은 도시에 사는지라 반갑다며 우리의 숙소를 찾아 왔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랑 같이 왔다. 약혼자라고 소개했다. 나도 집주인과 일행에게 진경을 소개했다.
“나의 야학제자 진경이......”하면서 진경의 얼굴을 보는 순간 흙빛으로 경직되며 큰 낭패를 본 듯 거의 울상에 가까워지는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대학졸업장이 혼수의 필수품인 한국사회에서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는 결혼 배우자를 선택하는 큰 기준이 되어 왔다.
진경의 지적수준이나 용모는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수준은 된다고 보여 졌다. 굳이 정규학교를 못 다녔다고 밝힐 이유야 없겠지만 학력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정규학교를 못 다녔다는 것은 열등의식이 생기게 마련이다. 또 결격의 사유가 되기도 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진경은 학력에 대해 약혼자에게 조금은 과장했던 것 같았다. 어느 정도까지 약혼자에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반가운 마음에 ‘지난날의 야학 스승’을 만나서 진경의 입장이 난처해 졌음은 틀림이 없었다.
소개가 끝난 이후 우리는 수박이랑 과일 등 여름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었지만 어색하고 불편함은 마음 한켠을 무겁게 했었다.
청첩장도 받지 못 했다.
그러고 헤어진 이후 서로의 삶 속에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니 연락은 끊어지고 세월은 흘러 진경이도 지금은 50대 중반이 되었을 것이다. 인생은 매듭 매듭 이어져 이루어지는데, 풀어지지 않는 매듭은 가슴 한구석에 회한으로 응어리져 있다.
잘 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