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소감 - 안 경 희
아버지와 저만의 비밀 이야기를 이제 세상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에 고쳐 못 할 일을 해 버린 저의 어린 날은 지울 수가 없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경책이 되기를 소망 합니다. 보는 분마다 효성의 꽃나무가 한 그루씩 가슴에서 자라나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밝히는 신문! 세명일보에 감사드립니다. 신춘문예를 있게 하신 사장님과 심사 위원님들, 도움주시는 분들, 수많은 미래 작가들의 목표가 되고, 삶의 의미가 되는 길을 열어 주신 소중한 마음을 찬탄합니다. 귀한 뜻 알아차리고 사박사박 정진하겠습니다.
주요약력
1963 경북 문경 출생
한국보험금융 지사장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과 재학 중
당선작 - 아 버 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시험에 낙방하여 집에 있으니 한 달도 못되어 온갖 괴로움이 내 것인 양 폐인처럼 느껴졌다. 집에서 대학을 보내 주리라고 시험을 본 건 아니었다. 자존심에, 못 다니더라도 ‘나 합격했다’하고 싶어서, 식구들 졸라서 한 학기만 다니고 휴학한 다음 돈 벌어서 다닐 생각이었다. 떨어지고 나니 후기나 전문대는 염치도 없고 그만한 배짱은 못되었는지 포기하고 집에서 울었다.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우리 집 형편으로는 과분하였다. 내 졸업장에는 엄마의 금가락지도 들어있다. 대학에 떨어진 것이 부모님께는 마음 아픈 다행이었다. 겨우내 친구들과 놀면서 할 일없이 밥만 축내고 있다가 삼월이 되니 같이 놀던 친구들은 하나 둘 대학으로 가고 혹은 취직되어 나갔다. 나의 일상은 밤늦게 자고 점심때가 지나야 일어나서는 사사건건 식구들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다.
그날도 늦게 일어나 혼자 점심을 먹고 따스한 햇살을 따라 텃밭에 나가보니 나뭇가지는 물이 올라 꽃자리마다 봉긋하고, 보드라운 땅에는 온갖 새싹들이 들썩들썩 역도선수처럼 흙덩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전깃줄에는 새들이 와글와글, 세상 모든 것이 저마다 할 일이 있고 쉼 없이 움직이며 즐겁기도 하건만, 내화리 촌처녀의 근심은 아버지 지게위에 나뭇짐 같았다.
“아버지, 저 오빠 집에 갈래요.”
“가서 뭘 하려고?”
“몰라요......”
“막내도 이제 고등학교 가고 내 너를 더 공부 시킬 수가 없구나. 오빠한테 가지 말고 점촌서 텔렉스학원 다니면 취직 잘된다고 하던데 생각 해봐라.”
“싫어요. 취직 안 해요. 아버지는 왜 돈이 없어요?”
순간,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 말을 들으신 아버지도, 그걸 말이라고 해버린 나도 멍 하여 잠시 세상이 정지된 것 같았다. 찰나 간에 수천볼트의 전류가 내 몸을 지지고 나갔다. 아버지는 그날 20년 키운 못된 송아지 뿔에 받혔다. 아버지가 돈이 없는 이유를 나는 너무 잘 안다. 아버지 주머니는 밑이 터져 있었다. 소 판돈도, 나락 판돈도 금방 빠져버리는 이상한 주머니였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두 분 다 장님이셨다. 팔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아버지는 부모님을 모시려고 열여덟에 장가들어 오남매를 낳으셨다. 초가삼간에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지어서, 그 많은 식구가 굶어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노고가 짐작이 된다. 세상의 편견과 멸시는 혹독한 가난만큼이나 아버지를 힘들게 하였다. 큰오빠는 막내삼촌과 동갑인데 초등학교 마칠 때에 할아버지께서 “아들은 중학교를 못시키니 손자라도 보내 거라.”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차마 오빠만 가르칠 수가 없어서 둘 다 못 보내고 두 분은 열네 살 어린나이에 서울에 돈벌러갔다. 삼촌과 오빠가 안쓰러워 엄마는 자주 편지를 보냈는데, 엄마가 글을 몰라서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부터 대필을 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호롱불을 켜고 바느질을 하면서 편지글을 불러주시다가 엄마가 울면 나도 따라 울었다.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그 다음날 인천에 있는 셋째 오빠 집으로 갔다. 며칠을 고심하다가 어찌할 수 없는 내 처지에 떠밀려 부평에 있는 기숙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로부터 2년 동안 나는 전축의 디스크 올리는 부분 <턴테이블>을 만드는 해태전자에서 완제품 검사하는 일을 하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기숙사 식당에서 교육방송을 들으며 공부하였다. 원래 목표는 4년제 야간대학이었으나 2년간 주경야독을 해보니 그만 겁이 나서 전문대학 응용미술과를 가게 되었다. 그간 모은 돈은 서울에서 방도 얻고 학자금으로 귀하게 썼다. 방학이 되면 무조건 돈을 벌었고 오빠들도 많은 도움을 주셨다.
졸업을 앞둔 시월 어느 날, 우연히 친구 집에서 신문을 보다가 내가 다니던 회사의 사원모집 광고를 보게 되었다. 디자인파트는 한명을 뽑는데 나는 망설임 없이 원서를 냈다. 면접 때 대표이사님께서 “전에 식당에서 공부해가지고 대학 간 사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오늘 주인공이 왔네요. 수고 했어요.”하셨다. 한 달 후에 합격통지를 받았다. 재산세 2만 원 이상 내는 사람의 재정보증이 필요해서 아버지께 입사서류를 부탁드렸다. 당시만 해도 그만한 재산세를 내는 사람이 드물어서 여기저기 부탁하고 알아보시는 동안 아버지는 너무나 행복해 하셨고, 발걸음이 가볍다못해 날아다닌다고 이웃 분 들이 놀리셨다고 한다. 해태전자 디자인실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나는 아버지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적으나마 틈틈이 가계를 도왔다. 결혼비용도 전혀 부담 드리지 않았다. 그날의 아픈 기억은 두고두고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아버지, 그날 아버지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노여움 없이 다만 어리게, 담담하게 저를 보셨던 아버지! 이제 저도 아버지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