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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상주邑城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성벽 최초 확인 성과 거뒀다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21.03.30 18:14 수정 2021.03.30 18:14

우리 문화유적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도굴로써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이 바람에 우리 문화재는 현재 일본이 대다수를 불법으로 가져갔다. 성주읍성은 그나마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상주읍성 상주 복룡동 유적은 상주시 복룡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도시 유적이다. 사적 제477호이다. 2004년 대한주택공사에서 택지개발을 위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의 건물지, 연못, 수혈유구(竪穴遺構), 구상유구(溝狀遺構) 등이 확인됐다. 택지개발 사업은 취소됐다.
2019년 상주박물관에 따르면, ‘성벽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해자가 처음 발견됐다. 상주읍성은 고려 시대 때인 1381년(우왕 7년)에 처음 쌓았다고 전해진다. 지방에서는 드물게 4대 문 사진이 모두 확보된 바 있다. 상주읍성의 4대 문과 성벽(1525m)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모두 훼손됐다.
지난 29일 상주시에 따르면, 한국문화재재단이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발굴 조사 중인 상주시 인봉동에서 ‘상주읍성의 성벽’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상주읍성은 인봉동 35-5번지 유적(면적 233㎡)에서 발굴됐다. 성벽은 체성부 아래의 기저부만 확인됐다. 이는 1912년 일제의 읍성 훼철 당시, 지상의 성벽이 철거됐다. 성벽 기저부 위쪽이 임시 도로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참으로 무지막지한 일제이다. 당시 지적도 상에 ‘성도’(城道)로 표기한 것도 이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일제강점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벽 자리 위에 건물들이 건축되면서, 기저부도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기저부의 규모는 길이 760㎝ 정도이다. 조사 대상지의 북쪽과 남쪽 조사 경계 밖으로 이어졌다.
너비는 성벽 외벽 쪽인 동쪽 지대석에서 내벽 쪽인 서쪽으로 470㎝ 정도만 확인됐다. 나머지는 유실됐다. 높이는 40㎝ 정도만 확인됐다. 성벽 기저부를 견고하게 축조한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대석은 가운데 부분이 유실되어, 5매만 확인됐다. 이 역시 조사 경계 밖으로 계속 연결된 양상이다. 이와 별도로 성벽 동쪽의 일제 강점기 건물지 지반 보강을 위해, 훼철된 성벽의 큰 성돌이 다수 사용됐음이 확인됐다. 축조 시기는 성벽 기저부의 다짐층과 보강층에서 조선시대 전기 백자종지편이 출토돼, 조선시대 전기로 판단된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상주읍성은 1385년(고려 우왕 11년)에 축조된 후, 일제의 읍성 훼철령(1910년)에 따라 헐리게 되는 1912년까지 520년 이상 유지됐다. 고려 말 왜구 침임에 대비해 만들어진, 읍성은 조선 초기 경상감영(慶尙監營)을 뒀다. 당시 경상도의 행정·문화·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표조사와 연구를 통해 성벽의 위치에 대해 추정만 했을 뿐, 그 실체는 확인하지 못했다. 조사 대상지가 일제강점기(1913년)에 제작된 지적도에 성도(城道)로 표시된 부분에 해당함을 현재 지적도와의 비교로 확인했다. 바로 이 자리가 상주읍성의 북동쪽 성벽임을 이번 발굴조사로 밝혀냈다.
지금까지 상주읍성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는 2019년 해자 조사에 이어, 이번 성벽 기저부 조사가 두 번째다. 이번 한국문화재재단의 조사는 소규모 면적에 대한 성벽의 기저부 조사지만, 문헌기록으로만 확인되던 상주읍성 성벽의 실체와 위치를 정확히 찾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상주시는 상주읍성의 전체 위치 등을 찾는 한편 읍성 정비·복원의 계기로 삼을 계획이다.
강영석 상주시장은 “지역에서 처음으로 상주읍성 성벽이 확인됨에 따라 상주읍성 복원 사업에 탄력을 받게 됐다. 앞으로도 상주읍성의 실체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성주읍성은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앞으로 발굴사업에서 그 당시의 원형을 찾고, 미진한 부분은 현재까지 발굴 성과와 문헌 고증으로 잘 복원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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