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한다. 나도 그말에 전적(全的)으로 찬동한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세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첫 번째 기회는 1962년 가을에 있었던 육군간부후보생 선발시험이었다. 응시자격은 민간인은 4년제 대학졸업 이상 학력을 갖춰야 하고, 현역복무 병사는 고졸이상이면 응시가 가능했다. 수험과목은 국어, 사회, 수학, 영어의 네 과목이었다. 평균 60점 이상이면 합격이었고, 과목낙제가 없어야 했다. 1,500명이 응시하여, 100명을 뽑아 경쟁률은 15:1로 당시로 봐선 높은 경쟁률이었다. 그때 나는 육군본부 부관감실 병장으로 만기제대를 1년 앞두고 있었다. 모진 가난 때문에 고졸하고 대학입시원서도 낼 수 없었다. 고졸(1960년)하고 처음 응시한 시험이, 육군간부후보생 183기(1962년)시험이었다. 모집병과가, 보병이었다면 아예 응시를 포기했을 것이다. 간부후보생 183기는 병과가 특과 장교(포병, 기갑, 통신, 공병)여서, 구미가 당겼던 것이다. 그 시험에서 나는 사회과목은 100점 만점에 97점을 획득했다. 합격하고 나서 보병학교 입교는 이듬해(1963년) 2월말에 있었다. 벌판에 있는 광주 보병학교는 2월말에도 눈보라가 치고 겨울바람이 몹시 불어 광주 불순의 하나인 일기불순이 실감이 났다. 혹독한 강훈련을 못견뎌내고 약골(弱骨)인 나는 자진퇴교(自進退校)를 도모했지만, 우수한 성적이 퇴교(退校)를 방해했다. 나의 체력 한계로 퇴교를 강행했다. 간부후보생은 선발 시험 합격보다 퇴교가 몇 백배 어려웠지만, 전교사 군종 참모 박치훈 소령님과의 면담이 퇴교를 성사케 해 주었다. 지금까지도 박지훈 군목님의 인간애에 깊은 감동을 느낀다.
나는 보병학교 퇴교 후, 야전군(1군)으로 전출명령이 났다. 나는 복무기간 중 육군본부 보병학교(2군), 11사단(1군)을 골고루 체험하여, 뒷날 작가(시인)수업을 착실히 한 꼴이 되었다.
두 번째 기회는 현대경제일보 수습기자 공채시험(1969년) 합격이다. 응시자격은 4년제 대학 졸업이 기준이었다. 84명이 응시하여, 7명이 합격했는데, 나는 2등으로 합격했다. 7명의 수습기자들이 첫 회식자리에서, 줄(빽)을 까놓기로 공론이 돌아, 나를 제외한 6명은 어마어마한 신문사 실세들(사장, 부사장, 주필 등)을 업고 합격했다.
나의 빽은 하느님이었다.
타고난 달변으로 난처한 질문을, 유머와 위트를 섞어 응구첩대하여, 20여명의 면접관을 포복 졸도케 하여, 차상(次上)으로 입격(入格)했지만, 수습기자 교육 초기에 서울시내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쇼크(?)를 받아, 미련없이 당일 사표를 제출, 대어(大魚)를 낚았다고 환호하던 신문사 중역들께 너무 빨리 실망을 안겨 드린 것을 지금까지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고려대학교 영문과 출신 재원 서희순 씨(원주출신)가 내 빈 자리를 채워 주었다. 내가 살신성인(殺身成仁)함으로, 한 사람의 열렬한 언론 지망생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나와 같이 입사한 수습기자 동기생 중엔 끝까지 신문사에 근속하여 편집부국장이 된 사람이 두 명이 났다. 수습기자 동기 이동혁 기자는 기자가 된 다음에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관계로 진출했다. 내가 잠시 수습기자로 있던 현대경제일보는 뒷날 한국경제신문사로 되어, ‘한국경제신문’은 목하(目下) 우리나라 5대 일간지로 손꼽힌다. 유가지부수가 51만 부가 넘는 대 신문이 되었다. 잠시 머물렀던 옛 친정이 번창하니, 내심 기쁘기 그지 없다. 내가 비록 기자로선 입신(立身)을 포기했지만, 일간신문(경북매일신문, 대구신문, 세명일보)에 9년 이상 계속 칼럼을 싣고 있으니, 젊어서 접었던 언론계의 꿈을, 늘그막에 정론직필(正論直筆)로 재개(再開)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기회는 문교부 시행 중등준교사 자격고시 검정합격(1969년 역사과)이다. 당시 벽지 초등학교(초년병)교사로, 고학년(5학년)을 가르치면서, 전기도 안 들어오는 두메산골마을에서 퇴근 후 4시간을 호롱불 밑에서, 3개월간 공부하여, 그해(1969년) 9월에 서울 풍문여고에서 자격시험을 보고, 필기시험(주관식)에 합격하여, 면접시험(3문제)을 거쳐 최종합격하여, (1969년 12월 27일), 문교부장관이 발급한 중등교원자격증(본7976호·역사준교사·검정종별 고시검정·문교부장관)을 획득했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기뻤던 것은,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1967년)과 중등준교사 역사과고시검정(1969년)이다. 나는 남들이 따기 어려운 큰 별을 2개나 거뜬히 따냈다. 중등준교사 고시검정시험은 교육계의 최고 교사자격시험으로 합격하기가 만만찮은데, 3개월의 짧은 시험 준비로 단발명중(單發命中)시켜 기분이 보통 통쾌한 게 아니었다. 벽지 초등학교 교사는 교과지도 말고도, 잡무 부담이 과중했다. 만난을 단시일에 극복하고, 창공에 비상할 기회를 포착했다. 곧 바로 중등교원 임용고시(순위고사)에 응시(역사과)하여, 36명 응시자 중 당당히 3위로 합격하여, 1970년 3월 1일자로 가은중학교 역사교사로 발령이 나고, 급기야는 국공립 중 고등 학교장이 되었다.
나의 성공의 비결은 목표를 적절하게 세워, 아예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독한 역경 속에서도 세상을 밝게 보고 삶을 올곧게 살았다. 쓰잘 데 없이 금수저·은수저·흙수저 타령을 일삼지 말고, 스스로 빛나는 금수저를 만들어 저력을 과시해야 참된 인생이다.
<덤 詩 >
신의 은총/김시종
나에게 눈물의 참 뜻을
깨우쳐 주시려고,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아버지를 압수해 가시다.
(PEN문학/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