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 50주년이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8시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1970년 11월 13일, 나이어린 청계천 2만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외치며 산화한지 반세기가 흘렀지만, 아직도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인권은 그대로다.
외형적으로 8시간이나 최저임금 등이 개선되었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정책으로 비정규직이란 21C형 청계천 노동자들이 망령처럼 되살아나고 있다.
다 같은 노동자가 도대체 정규직은 뭐고 비정규직은 뭐란 말인가? 꿈자리라도 몸서리쳐지는 IMF사태 이후 자본(경영)가들이 인건비를 삭감하고 구조조정이 쉽도록 만들어낸 신출귀몰할 대사기극이다. 글자그대로 비정규직이란 한 두 달 짧은 기간에 쓰는 임시직이란 말인데도 불구하고, 1년, 2년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비정규직이란 이름으로 임금은 절반밖에 주지 않는 기상천외한 것이다.
거기다가 오랑캐를 오랑캐로 잡는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하여, 노동자를 노동자로 잡는 이노제노(以勞制勞) 전략으로 비인간적인 노동착취와 정리해고 같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오랑캐가 아닌 동족이요, 동지들을 갈라치기로 이용하는 불순한 정치권력과 자본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세계화정책으로 얼굴 없는 다국적 투기자본까지 침투하여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으나, 비정규직은 노동조합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이 무방비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계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정규직 노동조합도 움츠릴 수밖에 없어서 비정규직을 한 가족으로 싸안지 못하고 싸우고 있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세계자본가여 단결하라’는 말은 안 해도 꿀맛 같은 이윤추구로 쉽게 단합되지만, ‘세계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은 비명을 질러도 죽음을 무릅써야 되는 육탄전에 뛰어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총칼 앞에 죽창으로 쓰러져간 의병과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다를 바 없는 역사적 비극이다.
그러한 여파로 대기업의 정규직노동자 외의 비정규직은 물론 집배원이나 택배노동자들의 잇단 과로사가 충격적이다. 민주국가요 OECD국가에서 건강한 사람이 노동으로 과로사를 한다는 것이 21C라는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소득 3만 달러는 빛 좋은 개살구인가? 그래도 성장만 있고 분배란 말만하면 빨갱이라고 뻥긋거리는 사람들은 자본의 나팔수인가? 아니면 무지의 소치인가?
분명한 현상으로 IMF 이후로 국민들의 실질소득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80~90년대 고도성장으로 대한민국은 중산층이 튼튼하게 형성되었으나, IMF 이후 세계화경제정책으로 금융시장이 개방되고 다국적 투기자본들이 침투하여, 공기업 민영화와 인수합병 및 구조조정 등으로 대한민국의 중산층이 무너지고 말았다. 외국자본까지 포함하여 국내총생산(GDP)은 늘었는데 국민소득이 줄었다면, 그것은 국부유출과 빈부격차만 키워서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사회악일 뿐이다.
최근 38명이나 희생 된 이천 물류창고 화재를 비롯한 외주·하청공사 안전사고가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책임지는 자본가는 없다.
그 책임 또한 노동자로서 외주하청의 비정규직보다 조금 나은 정규직 중간관리자만 처벌받을 뿐이다.
이렇게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이노제노(以勞制勞)의 산업현장을 외면하고 한국이 강성노조라고 말하지만, 한국의 정경유착과 불투명경영의 노조탄압은 말하지 않는다.
한국사회는 일제강점기부터 남북 분단까지, 자주성을 바탕으로 한 민족사관과 노동운동을 말살하고, 식민사관과 반공을 국시로 내세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더욱 통탄할 일은 아직도 대한민국 헌법에 노동자라는 말은 없다. 그래서 자주적인 노동자를 피동적인 근로자로 부르며 근로기준법을 만들었으나, 그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바로 세워서, 노동의 가치를 정립하고 노동기본권을 보장하여, 제2, 제3의 전태일과 김용균의 비명이 들려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