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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루벌이 쌀 1되’ 경제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20.11.03 17:32 수정 2020.11.03 17:32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EBS방송 중 ‘한국기행’은 재미도 있고 참신한 기획이 돋보여, 본 방송만으로 직성이 안 풀려 재방송도 놓치지 않고 챙긴다. 한국기행 중 인상이 깊이 남는 곳은, 경북 예천과 울진편이다. 울진군편에서 2부 ‘왕피천 67.8㎞’와, 4부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십이령옛길’ 편이 백미다. 울진군 북면 부구리 소재 ‘흥부장’에서 60㎞ 상거의 봉화군 춘양장을 가는 열두 고개-십이령 옛길에 조령성황사가 있는데, 조령(鳥嶺)은 문경새재와 같은 조령이라 자연스럽게 필자의 눈길을 끈다.
‘열두 고개’에 얽힌 지게 부상(負商), ‘울진 바지게꾼 노래’를 잠시 들어 보자.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은 언제 가노/ 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언제가노/ 반평생을 넘던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서울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오고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자고 넘네/ 꼬불꼬불 열 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중략)
지게에 어물짐을 지고 산고갯길 60㎞를 허위허위 걸어 춘양장 보러 가는데, 2박 3일의 여정이다. 어물짐 지게엔 취사도구인 솥까지 달려 있다. 산속 고갯길에서 밥을 지어먹고 주막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백오십리 왕복에 3일이 걸리는데, 울진에 와서 되팔면 3일간 수입이 쌀 석되나 된다고 한다.
요사인 엔간하면 하루벌이가 쌀 한말을 버는 것은 보통 이하의 벌이 밖에 안 되지만, 지난날엔 장정 하루 품삯이 쌀 1되다. 조선 효종 때, 조선에 표류한 하멜이 훈련도감 군관으로 있을 때 월급이 쌀 80근(48㎏)이었으니, 하루 쌀 1되씩 받는 품삯이 당시 조선시대로 봐선 꽤 괜찮은 벌이였다. 조선시대 쌀 생산량은 논 한마지기에 쌀 여섯말(60되)이 고작이었다. 요사이는 한마지기(200평)에 보통 4가마(20말)가 생산된다. 조선시대엔 머슴살이 하면 1년 새경이 쌀 3가마(15말)였다. 옛날 사람들은 하루 쌀 1되 벌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고기반찬에 쌀밥도 맘껏 먹어, 옛날 사람들 설날보다도 요사이 사람들은 호강을 하고 있지만, 유족한 생활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안 보인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나날이 사는 삶이 고단해도, 부모형제에 대해 사람의 도리를 다했다.
인간다운 삶은 풍요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풍족한 삶에 고마움을 알고, 행복의 터전인 이 나라와 이 땅을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장정 하루 품삯 쌀 1되를 받고 더 없이 행복해 하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복돼 보인다. 하루 쌀 20되 이상 벌이를 하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미욱해 보인다.
잘 살든 못 살든 인간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배려하는 것이 진짜 행복하게 사는 길이 될 것 같다.
1959년엔 결혼 부조가 쌀 1되면 후한 편이었다. 그해 가을 작은 누나 결혼식 때 이웃집인 박시현 학형의 모친이 못 살던 우리집 누나 잔치에 쌀을 다섯 되나 부조로 보내 주신 것을 지금도 나는 잊지 않고 고맙게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죽고 말지만, 생전에 끼친 선행은 길이 전해지는 것이다.
쌀 1되가 하루 경제생활의 댓가였던 지난날을 우습게 여겨선 안된다. 선인들의 고생 덕분에 후손들은 번영된 오늘을 누리게 된 것이다. 쌀 한 톨이라도 아껴 모은 쌀을 외국에 수출하여 국가의 빚을 청산하도록 규모 있게 가정살림과 국가살림을 유의해서 잘 살아야 한다. 후손에게 과도한 빚(국채)을 물려 주는 무책임한 선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 내 잘못이 후손에게 멍에가 되어선 절대 안된다. 명념할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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