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나)는 가을날에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올 때 가을꽃이나 고운 단풍을 꺾어 오는 일은 거의 없다.
예외적(例外的)이지만, 향기 짙고 노랗게 빛깔이 고운 모과(木瓜)는 몇 개씩 지니고 와서 식구들(세사람)이 거처하는 방에 두 세 개씩 놓고 볼 수 있도록 배려를 잊지 않는다.
세상에 떠도는 말이 많지만 그 중에 내가 절대 공감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실과(과일)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다.
모과(木瓜)란 모과의 겉모습을 잘 관찰하고 나서 모습에 걸맞게 잘 붙인 이름이다. 모과는 길쭉하고 둥근 것이 꼭 참외를 닮았다. 모과란 나무에 달린 참외라는 뜻이다. 실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은 잘 익지 못한 미숙한 열악한 모과를 보고 사려없이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이라고 본다.
노랗게 잘 익은 모과를 보면 튼실하고 둥글둥글한 것이 나무랄데 없이 잘 익고 잘 생겼음에 감탄사를 연발할 수 밖에 없다. 모과를 얇게 저며, 꿀을 넣고 잘 숙성시키면 겨울 한철을 감기가 어떻게 생긴줄 도 모르고 건강하게 겨울을 날 수 있다.
필자가 모과에 짙은 감동을 느낀 것은 1969년 9월 중순경이었다. 먼지가 자욱한 시골길(지방도)을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시골집 뒤안의 모과나무가 눈에 띄었다. 주렁주렁 달린 모과가 강풍에 힘겹게 흔들렸는데, 모과나무 밑에 떨어진 모과 낙과(落果)는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모과나무에 달려 시달리는 성한 모과보다 안정과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필자에게도 1969년은 격동기였다. 쪼잔한 현실을 과감하게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이상 몸부림을 쳐야 했다. 2년간의 초등교사 의무 복무기간을 끝내고, 중앙일간신문인 H경제일보 수습기자 시험에 응시하여 경쟁률이 12:1이었는데 수습기자 합격자 7명중 2등(차석)으로 합격했다. 배경도 줄도 없이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면접시험에 1등이 되어 스타(?)로 떠올랐지만, 당장 눈앞의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어렵게 딴 공채 기자직을 포기하고 말았다.
현실의 난관을 극복하고 기자직을 사수(死守) 못하고 쪼잔한 현실에 주저앉고 말았다. 쉽게 포기한 것이 아니라 몇날 밤을 번뇌하였다. 두 직장을 두고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2인 3각관계의 연애구도보다 처절한 것이었다.
필자(나)는 1969년의 중앙일간신문 수습기자 공채합격을 포기하여 신세를 조진 듯 위축됐지만, 1969년 12월 27일 문교부 시행 중등준교사 고시 검정 역사과에 단발명중(첫해합격)하여, 단번에 재기에 성공하고 경북도 중등교사 임용고시(1970년 2월초 실시)에 역사과 응시자 36명중 3등으로 합격하여, 1970년 3월 1일 문경군(당시) 가은중학교 역사교사로 변신을 했다. 27세 젊은 나이에 ‘낙과(落果)’라는 명시(名詩)도 짓도록 정신이 조숙케 됐다. 청년기의 진로 선택의 심각한 고뇌를 되새기며, 당시 상황을 잘 나타낸(시) ‘낙과(落果)’를 만나 보려 한다.
전생(前生)의 나무에도
현생(現生)의 수풀에도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스스로운 낙과(落果) 한 알
매여서 흔들리던 적을
그윽히 돌아 본다.
옛임아 아는체 마오
푸진 고요 엉클릴라
전생의 업보도 현세의 업연도
일체(一切)벗어나 나는
억겁(億劫)도 한결로 고요히
현세로만 누려지이다.
※ 덧말 → 1970년 현대문학 8월호에 시월평(詩月評)란에 신석초(申石草) 중진시인이 ‘낙과’는 현대에 신라의 향가를 재현(再現)한 시라고 격찬을 아끼시지 않아 젊은 시인이었던 필자를 크게 격려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