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도 가끔 문경시청에 들리면 시청광장 가장자리에 우뚝 선 당교사적비와 마주친다.
당교사적비는 점촌시 2대 시장 신의웅 관선 시장이 세웠다. 신의웅 시장은 부임하는 임지마다 그 지역에 걸맞는 사실(史實)을 발굴하고 기념비나 기념탑을 조성하여 지역민의 애향심을 북돋아준 고마운 지방단체장이었다. 점촌시장으로 오시기 전에 군위군수로 재직하시면서 역사박물관을 세워, 군위군민의 자존심을 세워 주셨다. 아다시피 군위 인각사는 ‘삼국유사’의 산실이기도 하다.
점촌시장으로 부임하신지 얼마 안되어 필자가 신 시장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삼국유사에 실린 ‘당교’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당교(되다리) 부근에 사적비를 세우는게 어떠시겠느냐고 화두를 꺼냈다. 곧바로 삼국유사에 실린 당교역사를 복사해 드렸다. 신 시장님은 필자의 건의를 받아들여 당교사적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 당시 점촌시민들은 점촌시에 대한 정체성이 전혀 없고 점촌(店村)이란, 옛날에 사기를 빚는 점놈이 살던 동네라고 점촌자체를 비하했다. 신 시장님은 내게 당교사적비 비문까지 맡겼다. 주문을 받자마자 필자는 곧바로 당교사적비 비문을 완성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필자는 원고 청탁을 받으면 그날 바로지어 속달등기로 보내는 괴벽(?)이 있다. 필자가 비문을 짓고 나니 시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비문을 저명교수가 지어야지 중·고 교사가 지으면 되겠느냐는 등 흔들어 대어 나는 곧바로 낙마(落馬)하게 되었다. 비문 내용이 부실하다면 이해가 되지만 교수가 아닌 것을 탈잡았으니 너무 한심스러웠다. 당교사적비의 입안자요 중심이었던 필자는 하루 아침에 찬밥 신세가 되었다.
문화원과 시청 관계자가 직접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박영석 위원장을 방문하고, 당교사적비 비문을 지어달라고 사정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이유는, 야사에 있는 몇 줄의 기록을 맹신하고 비문을 지어주는 것은 무책임한 일로,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공인이 할 일이 아니라며 명백하게 거절했다.
내게 들리는 다음 소문은 대구에 있는 지역출신 국문학 교수 H씨에게 비문을 받아 보자는 얼토당토 안한 일을 획책하기도 했다. 그 동안 애쓴 필자를 따돌리고 멋대로 한 짓거리가 고마울 리야 없지만 발의한 일인 만큼 내가 구원투수를 자청하고 나섰다.
몇 해 전 한국 중등학교 역사교사단의 일본문화재 및 사적지 탐방때 지도교수로 일본에 다녀오신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정영호 교수님이 생각났다. 정영호 교수님은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시고 수십년 역사학 교수로 재직중이고, 국사편찬위원이며 문화재위원으로 당교사적비문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이상 적격자가 있을 수 없었다. 필자가 정영호 교수를 찾아가 그간 안부를 묻고 비문을 지어 주시면, 당교사적비 사업이 더욱 빛나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비문을 짓자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다며 일단 쾌락하셨다.
필자는 호주머니에서 당교사적비문을 지은 것을 꺼내어 보여 드렸더니 한번 훑어 보시더니 이 이상 비문을 지을 수 없다며 내가 드린 비문 초안을 비문 원안으로 즉석에서 확정지었다. 단 문장 중 ‘하여’를 ‘하며’로 글자 한자만 고쳤을 뿐이다. 필자의 조그만 활약으로 당교사적비는 급물살을 타고 제막식을 갖게 됐다.
제막식 날 당교비 건립 유공자는 필자가 아닌 엉뚱한 인사였다. 세상살이는 밥 짓는사람 따로 있고 밥 먹는사람 따로있게 마련이다. 솔로몬왕에게 제소한 창녀 재판사건이 생각난다. 솔로몬왕이 두 창녀를 다툴 것 없이 산 아이를 절반으로 두동강 내어 공평하게 가져라 했을 때, 아이의 진짜 어머니는 “이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니 저 여자에게 그냥 주라”고 했다지 않은가.
필자가 당교사적비를 지금도 주목하는 것은, 비문을 내가 기초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날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은 신라의 위대한 삼국통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최대강국 당을 물리치고, 당시 다른 민족이었던 삼국의 민족통일을 이룩하고 일본의 잦은 침략도발을 없애고, 민족문화를 하나로 이룩한 저력은 강국 고구려도 못한 일을 약골 신라가 해낸 것이다.
만일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중국이 한반도 전역을 먹어 치워, 오늘의 대한민국은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것은 우리 역사 최대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비로소 밝히지만, 신의웅 시장님이, 저를 부임하자 곧 만난 것은, 신시장님 절친인 대구대학교 오상태 교수(시인)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