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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서기 김영순 선생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6.19 20:10 수정 2019.06.19 20:10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그녀는 작고 가냘픈 외모를 가졌으나 결코 작지 않고 가냘프지 않았다. 용감하게 험한 시대를 살아내었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등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의 책무를 받아들여 애국심과 민족의식, 근대적 시민정신의 모범을 보였다”
이 논평은 독립운동가 김영순 선생에 대해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정은 원장이 발표한 논문에서 짧게 인용한 글이다.
김영순 선생은 1893년 서울 종로에서 아버지 김원근과 어머니 전준경 사이의 3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원근은 정신여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칠 정도로 한학을 공부했지만 개신교로 개종하여 정신여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영순 선생도 또한 자연스럽게 신종교와 신교육을 받아 신여성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한글과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 전통교육을 일찍부터 가르쳤고, 어머니는 바느질과 예의범절 등을 철저히 가르쳤다. 이 덕분에 13살에 연동교회 주일학교에 나가고, 1910년 나라를 빼앗긴 17살에는 정신여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실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신여학교 생활은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혼자서 외출할 수 없었고,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으며, 부모나 친척의 면회도 허락되지 않을 정도였다. 배우는 과목은 성경, 한문, 가사, 바느질, 수예, 음악, 체조, 습자, 이과, 지지, 역사, 어학, 수학, 동물, 식물, 생리, 도화, 작문 등 모든 과목을 총망라했다. 이 중에서 김영순 선생은 가사와 바느질, 한문과 습자를 가장 재미있어 했다.
1916년에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김영순 선생은 군산의 멜볼딘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첫 부임지에서 1년 정도 근무하다가 바로 모교의 부름을 받고 정신여학교의 기숙사 사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기숙사 사감은 적성에 맞아서 학생들 대상으로 가사를 가르쳤는데, 빨래, 다림질, 저고리와 두루마기 만드는 법, 음식조리법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던 중 1919년 고종황제가 갑자기 서거를 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들은 치마저고리에 검은 댕기를 달고 일제에 대항했다. 하지만 엄격한 규칙과 순종을 가르치는 학교 당국과 민족의식이 가득 찬 학생들 간에 긴장관계가 형성되었고, 1주일 동안의 동맹휴학도 뒤따르는 등 후유증이 심했다.
학교 당국은 이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고자 일본에 유학 가 있는 모교 출신의 김마리아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이미 일본에서 2·8독립선언서 낭독에 앞장선 후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귀국한 터라 오히려 학생들을 칭찬했다.
3·1운동으로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었고, 김영순 선생은 학생들을 보호해야 하는 사감이라서 뒤에서 돕고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신여학교 학생들 60여 명을 붙잡아 간 일제는 배우 인물로 김영순 선생을 지목하고 학교로 들이닥쳐서는 포승줄로 묶어서 끌고 갔다가 몇 개월 후에야 석방하였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혈성단애국부인회와 대조선애국부인회가 다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김영순 선생도 이 단체에 가입하였다. 김마리아 등이 주도한 이 부인회는 김영순 선생이 서기를 맡아 교장실에서 등사기로 취지서, 본부규칙, 지부규칙 등을 등사하는 등 적극 도왔다.
1919년 11월 28일이었다. 김영순 선생은 30여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재봉수업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만큼은 일본말도 필요 없이 솔기, 섶, 깃고대 등의 민족혼이 깃든 아름다운 단어를 사용하며 수업을 할 수 있었다. 바로 이때 교실 문이 열리며 일본 형사대가 들이닥쳐 학생들 보는 앞에서 김영순 선생을 교단에서 끌어내어 수갑을 채우고는 경찰서로 압송해 갔다. 부인회 회원인 오현주의 배신으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 전원이 체포된 것이었다.
김마리아, 황에스터, 김영순 선생 등 모든 간부는 대구로 압송되어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 온갖 고문이 뒤따르는 길고 긴 조사와 재판 끝에 김영순 선생은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감옥생활은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밤에는 30여 명의 수감자들이 서로 어긋나게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했다. 낮에는 빈대, 벼룩, 모기가 들끓는 곳에서 노역을 해야 했다. 겨울에는 발가락이 얼어 동상이 걸렸다. 한 순간도 쉴 수 없게 지친 몸을 괴롭혔던 것이다. 하지만 김영순 선생은 고통스러운 감옥 안에서도 죄수복을 만들었고, 동료들에게 신문지로 옷본을 떠 주며 저고리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1922년 5월 2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했다. 그리고 3·1운동 때 독립선언이 있었던 태화여자관에 출근했다. 이 역사적인 장소를 감리교에서 인수하여 사회교육 및 선교기관인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김영순 선생은 한문과 가사를 담당하여 후배 양성에 매진을 했다.
1929년 37세 때엔 애국지사인 이두열과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고, 이들을 모두 애국자로 키웠다. 이 과정에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아들의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가 없었다. 또한 남편의 오랜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홀로 농사를 지으며 가정을 이끌어가는 억척스러움도 보였다.
해방 후에도 연동교회에 출석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94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정부는 이를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하고 남편과 함께 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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