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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송죽결사대의 죽형제 제1회원 박현숙 선생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6.16 19:14 수정 2019.06.16 19:14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1890년대의 조선의 상황은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였다. 1894년 민중 억압적인 봉건제도와 외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구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갑오개혁에 이어,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에는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이어서 1896년에는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있었다.
이에 나라를 걱정하는 젊은 지사들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완전 자주독립을 위한 거국적인 운동을 전개하자, 국왕은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 됨을 선포하는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격변기에 또 한 분의 여걸이 태어났으니 그 분이 바로 박현숙 선생이다. 박현숙 선생은 1896년 평양에서 아버지 박정규와 어머니 최광명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굳건한 기독교적 신앙심 아래 자라다보니 교회생활을 통해 성경지식과 찬송을 배우는 과정에서 한글을 깨우치고 신지식을 접할 수가 있었다.
여아도 신식교육을 배워야 한다는 부모의 개화의식으로 초등과정의 정진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헐버트가 쓴 ‘사민필지’라는 교재가 있었다. 이 책은 지구, 유럽주, 아시아주, 아메리카주, 아프리카주를 장별로 각각 설명하고, 총론으로 태양계와 그 현상, 지구의 모습, 기후, 인력, 일월식, 지구의 현상, 대륙과 해양, 인종 등을 기술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지식들은 그 동안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같은 도덕론만 배우다가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된 당시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특히 박현숙 선생에겐 정말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래부터 총명했던 박현숙 선생은 ‘사민필지’를 비롯한 학교 공부와 성경공부를 통해 새로운 국가관과 세계관을 가질 수 있었다.
12세가 되던 1907년 세례를 받고나서는 조국애와 신암심이 더욱 불타고 있었다. 당시에는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활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으므로 내 조국 내 민족에 대한 애국심으로 더욱 불타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1910년 한일병탄이 일어나고 학교에서 ‘사민필지’를 비롯해 민족혼을 일깨우는 모든 서적을 금서로 정하고 압수를 해가자 나라 잃은 슬픔은 더욱 커졌다.
1910년에 정진학교를 졸업하고 중등교육과정인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숭의여학교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항일민족 교사인 김경희와 황에스터가 있어서 민족정신을 깨우치고 민족지도자로의 여성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학교였다. 이 학교에서 위 두 분 선생님이 주도하여 1913년에 송죽결사대란 비밀독립운동단체를 만들었는데 17세의 박현숙 선생은 학생회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선발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송죽은 송형제와 죽형제를 뜻하는 것으로 송형제는 총본부가 되고, 죽형제는 제2단계의 세포조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2, 제3 단계의 하위 조직으로 뻗어나가 전국적인 조직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물론 형제자매도 알 수 없도록 철저히 비밀조직으로 이끌어 갔다.
1915년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박현숙 선생은 전주의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서는 송죽결사대의 운영취지에 맞게 학생들을 엄선하여 비밀조직을 이끌었다. 그리고 기전여학교를 졸업한 임영신 등 제자들 또한 졸업하고는 각자의 위치에서 또 송죽결사대를 형성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바쳤다,
1917년에는 다시 숭의여학교로 부임하여서는 김경희, 황에스터를 이어 제3대 송죽결사대 회장이 되어 비밀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3·1운동이 다가오자 그간 준비해온 모든 역량을 여기에 결집시켰다. 박현숙 선생은 송죽결사대 학생들을 개별로 불러 신신당부하였다.
“지금 우리의 국권을 회복할 기회가 왔다. 우리는 단결하여 이 성스러운 작업에 용감히 참여하자, (중략) 언어 행동은 평소와 다름없이 태연해야 하고 염탐꾼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평양에서는 이 거사를 3월 1~3일에 걸쳐 하기로 하고, 특히 3일은 박현숙 선생의 책임 아래 거행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하기 위하여 부잣집 혼례식이 있다고 소문도 냈다. 그리고는 거사를 위해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숨기고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3월 1일 행사는 대성공리에 마쳤으나 거사를 마치고 집에 오니 이미 일본 형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그 길로 체포되어 1년형을 선고 받고 말았다.
출옥 후에는 안창호의 수제자인 애국지사 김성업과 결혼하였다. 그리고는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에 가담하여 맹렬히 활동하던 중 간부 80여 명이 모두 검거되었고, 최종 15명이 기소되어 박현숙 선생도 1년 6개월을 언도 받았다. 그리고 출옥 후 해방이 될 때까지 평양기독청년회 회장으로서 부녀자 계몽을 위한 사업에 성심을 다했다.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 정치세력을 피해 월남해서는 숭의학원을 남한 땅 서울에 설립하는 것에 이바지했고, 한국 여성단체 활동 등에 매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박현숙 선생은 조국광복의 완성을 위하여 믿음을 가지고 평생 동안 매진한 위대한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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