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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송죽결사대로 독립운동 시작한 황애덕 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6.11 19:58 수정 2019.06.11 19:58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한국의 여성운동은 1898년 찬양회가 조직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구한말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놓이자 여성들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여성도 국민의 일원이라는 점을 대내적으로 각인시켰고, 이어서 비밀결사 형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더니, 급기야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외적으로 여성 역할의 중요성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되었다.
황애덕 여사 또한 이러한 역사적 사명에 큰 기여를 했던 독립투사이다. 이 분은 1892년에 태어나 1971년 돌아가실 때까지 교육자요, 항일운동가요, 농촌계몽가요, 정치인으로서의 숭고한 삶을 살았던 분이라고 할 수 있다.
황애덕 여사는 많은 여성들이 식민지하 가부장제적인 굴레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일찍이 여성의 가치를 자각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며 살았다. 이런 배경에는 아버지 황석청과 어머니 홍유례가 평양 외성에 살면서 근대교육에 일찍 눈을 뜬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기 때문이다.
13세가 되던 해에 정진소학교 3학년에 입학하게 된 황애덕 여사는 서양선교사들로부터 새로운 문명에 대한 혜택을 많이 받았다. 당시 평양은 이미 타 도시에 비해 서양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고, 교육에 대한 열풍이 어느 지역보다도 뜨거웠으며, 게다가 정진여학교는 평양에서 여성을 위해 설치된 서북지역 최초의 여자교육기관이었다.
또한 평양은 일찍이 안창호 등이 여러 차례 방문하여 호소력 짙은 강연을 하고, 사람들에게 ‘애국가’ 등의 창가를 부르게 하는 등 그 당시의 어린 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도시였다.
황애덕 여사가 정진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자, 아버지는 미리 정해 둔 약혼자와의 결혼을 종용했으나, 황애덕 여사는 단식투쟁으로 거부하고, 이화학당 중등과에 입학하였다. 평양과는 또 다른 서울 생활에서 시야를 넓힌 황애덕 여사는 1910년 졸업 후 평양의 숭의여학교 교원으로 돌아왔다.
1913년 이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을 엮어서 애국비밀단체를 만들기로 하고 송죽결사대라 이름 짓고는 나이가 어린 사람은 죽형제, 나이가 든 사람은 송형제라 불렀다. 회장은 숭의여학교 1회 졸업생인 김경희가 맡았고, 매월 회비 30전을 내고, 매월 15일 밤 12시에 회의를 개최했다. 모임 장소는 학교 기숙사 지하실이었다. 모임이 시작되면 먼저 태극기를 펴서 경의를 표하고, 나라의 독립을 구하는 기도를 했다. 마지막으로 각각 자신을 성찰하고 서로를 비판하는 시간을 가졌다.
주요 활동은 머리카락, 떡, 자수를 팔아 군자금을 모아서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단체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송죽결사대 대원들은 졸업 후, 혹은 전근을 갈 경우에도 그곳에서 활동을 하면서 전국적인 조직화를 꾀하려 했다.
3년 동안 숭의여학교에 근무하면서 송죽결사대를 이끈 황애덕 여사는 1917년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황애덕 여사가 일본에서도 송죽결사대 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평양에 남은 김경희를 비롯한 책임자들도 모임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갔고, 이후 평양에서의 3·1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동경여자의학번문학교에 입학한 황애덕 여사는 의학공부에는 적성이 안 맞아, 당시 일본 여학생 유학계를 이끌고 있던 김마리아와 힘을 합해 여성대중잡지 ‘여자계’를 창간하고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이 친목회는 2·8독립선언서 낭독에도 참여하게 되고 마침내 일제의 검거열풍이 불자 황애덕 여사는 비밀서류를 감추고 일본 여성으로 변장하여 국내로 들어왔다.
국내에서는 미리 입국한 김마리아와 3·1운동을 모의하였고, 파리강화회의에 여성계 대표를 보내려고 자금모금을 하고 전달할 후 일경에게 체포되어 5개월 동안 감금되기도 하였다.
황애덕 여사를 비롯한 여성계는 항구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만들었다. 회장에는 김마리아, 부회장은 이혜경이 맡고, 본인은 총무를 맡았다. 지식인 여성들이 처음으로 국내외 해외지역 여성들을 총망라하여 거대한 여성항일단체를 결성했던 것이다.
본부의 모임 장소는 정신여학교 지하실이었다. 하지만 두 달도 채 지나니 않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열풍에 간부 전원이 체포되었다. 황애덕 여사 또한 그 날 밤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황애덕 여사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은 이후 한국 여성운동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대구경찰서에서 김마리아를 비롯한 간부들은 갖은 고문에 시달렸고, 황애덕은 6개월 동안 취조를 받고 난 후 최종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감옥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고 냄새가 나 견딜 수 없어서 기절한 적도 있었다. 하루 13시간 이상 고된 노동에 무릎과 치아에 이상이 생겨 평생을 고생해야 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낮에는 부역, 밤에는 죄수들에게 성경, 산술, 한글 등을 가르치며 꿈을 심어줬다.
출옥 후에도 여성의 계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각하고 태화관에서 여성교육운동, 근우회 활동, 그리고 미국 유학 후에는 여성농촌계몽운동, 여성소비운동에 몰두하며 여성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한 사람의 선각자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닫게 해 주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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