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의 한국여성들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제를 극복해야 하는 한편, 피식민지 국민으로서 자신을 어떻게 시민적 주체로서의 위치를 확립할 것인가의 문제 사이에서 성장해 왔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정답은 당시에 어떤 여성에게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이런 문제를 자수라는 주제를 가지고 성공적으로 풀어나간 분이 있었으니 바로 장선희 지사이다.
장선희 지사는 1893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한약 도매업을 하는 장준강과 이영숙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이면서 학문과 예술분야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장선희 지사는 일찍부터 영민했고 가축과 새와 꽃을 그리는 데 재능이 뛰어났다.
이런 재능을 발견한 부친은 1900년 8살이 되던 해에 황해도 안악의 양산공립소학교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했다. 13세에는 안신소학교 1회 입학생이 되었는데 16명의 여학생 중에서 장선희 지사가 제일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재능에 두각을 나타냈다. 학이나 참새의 날개깃털이 몇 개라는 것까지 알고 그릴 정도로 묘사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때 국운은 날로 기울어져 일제의 고문정치가 시작되고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도입하게 되어 1,300만 원이라는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다. 여기에 대응해서 국채보상운동이라는 주권회복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장선희 지사에겐 울분을 애국심으로 변화시킬 좋은 기회였다.
장선희 지사 가족 전체가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게 되는데, 부친은 묵화로 난을 그려서 팔고, 오빠 장인성은 매화·난초·국화·대나무의 네 가지 꽃봉투를 만들어서 팔아 의연금으로 납부했다. 여기에다 장선희 지사 자매 또한 본인들의 솜씨를 발휘하여 골무와 베갯모를 수예품으로 만들어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과 부인 최준례를 통해 5일장에 팔아 국채보상금으로 납부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장선희 지사같은 어린 자매까지 참여할 정도로 범국민운동으로 번지자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함으로써 좌절시키고 말았다.
1908년에는 안신소학교를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16살 어린 나이로 모교인 안신소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교사복을 입고 근무할 때 치마저고리 차림에 머리는 총각처럼 둘레 머리를 쳐서 핀을 꽂은 다음 수건을 쓰고 그 위에 삿갓을 쓰고 다녔다는 것이다. 개화기 당시의 여성 일상이 얼마나 고민스러웠나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1912년에는 김구의 부인인 최준례에게 교사 자리를 물려주고 서울의 정신여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정신여학교 편입은 배움을 통해 나라를 다시 찾으려고 모색하고 있던 장선희 지사에겐 물 만난 물고기마냥 보람찬 학창생활의 연속이었다. 한편으론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수 수련에 쉴 틈이 없었다. 즉, 민족문화인 자수 기술 습득이 곧 독립운동이라는 신념으로 학우들과 후배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해 갔다.
1914년 정신여학교 졸업, 1915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는 모교인 정신여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여기에서 수업시간에 미술·자수·편물·조화 등으로 어린 학생들 가슴에 애국정신을 한 뜸 한 뜸 수놓아 주었다.
“여러분, 깎아 세운 절벽이 아무리 위태로워도, 아름다운 꽃은 뿌리를 튼튼히 바위 속에 박고 피어납니다”로 시작되는 일장연설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오직 학문을 탐구하라”고 당부하는 말로 끝을 맺곤 했다.
1919년에는 2·8독립선언서를 숨겨온 정신여학교 선배인 김마리아와 의기투합하여 재령에서의 3·8독립운동을 주도했고, 또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동지들을 지원하기 위한 ‘혈성단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재정부장 겸 지방 통신원으로 조직부장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이 조직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개편하고 장선희 지사는 재무원을 맡아 16개 지회를 조직하고 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밀송하는 등 크게 기여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결국에는 조직이 일망타진 되는 과정에서 대구감옥에서 2년 6개월이라는 옥살이를 해야 했다.
수감생활 중에도 장선희 여사는 수형자들에게 그림, 자수, 조화를 지도하여 여죄수들이 희망을 찾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 정심정력을 다했다. 그리고 수감생활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겨울은 겨울대로 살을 에는 듯한 혹한을 견뎌내기도 힘겨웠지만 ··· 여름철에는 변기통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가 코를 찔러 숨통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 하지만, 빈대, 모기, 벼룩, 똥냄새, 그 모든 것이 나라 잃은 슬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1922년에는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다녀왔고, 1926년에는 오학수 목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1930~40년대의 일제의 악랄한 통치에도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냈다.
장선희 지사는 1970년 죽을 때까지 자수를 단순히 경제적 독립을 위한 실용성의 목적에서만이 아니라, 심미적 아름다움도 추구하는 예술작품으로서도 승화시켰고, 무엇보다도 민족문제와 여성문제까지 상호 승화시킨 한국 최고의 권위자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