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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대구 신암선열공원의 유일한 여성 독립운동가 이혜경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4.28 20:07 수정 2019.04.28 20:07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여성들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독립운동에 참가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교육 받게 된 것은 기독교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기독교를 통해 여성들이 굳건한 독립정신, 자강력 배양, 언행일치의 실천력, 단결력 등도 배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동양의 성리학은 여성을 탄압했다면 서양의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평등사상과 민주주의 교육을 통해 남자 못지않은 애국사상과 독립정신을 키워왔던 것이다.
이혜경 여사 또한 그러했다. 1889년 황해도 해주에서 개화파 인물인 이창직의 셋째 딸로 태어난 이혜경 여사는, 11살 될 때까지 캐나다 선교본부였던 원산에서 자라면서, 일찍부터 교회를 통해 개화사상으로 무장할 수 있었다. 이어 서울로 이주한 후 1901년 연동여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할 때까지 연동교회에서 교육을 받고, 김정식 선생을 만나 성경과 함께 애국사상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1907년 19세에는 동경여자학원으로 유학을 가 한국인 초대 유학생이 되어 동경YMCA 안에 세워진 동경한인교회에서 김정식의 지도를 다시 받게 되었다. 22세엔 동경여자학원을 졸업하고 정신여학교에 영어 교사로 부임한 이후 함경도 성진의 보신학교, 함흥의 영신여학교, 원산의 진성여학교를 거치면서, 훗날 3·1운동의 주역이 될 제자들에게 진정한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었다. 특히 원산 지역의 3·1운동에서 사립 진성여학교에 근무하는 이혜경 여사가 학교를 아지트로 삼아, 원산과 독립운동 총본부와의 연결을 도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때 세브란스 의전학생 김성국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정춘수 목사를 만나 서명날인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혜경 여사의 안내 때문이었다.
이분 덕분에 3월 1일이 되자 진성여학교 학생들은 선두에 서고, 취적대는 나팔을 불고, 5천여 명의 시위대는 태극기를 들고서, 질서 정연하게 시위행진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날의 시위에서 50여 명이 체포되었다가 14명은 재판에 회부 되었다. 그리고 김성국 또한 3월 5일 경성 남대문 학생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서 1년을 복역하게 되었다. 이러한 원산에서의 인연으로 이혜경 여사와 김성국은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1919년 9월 혈성단 애국부인회와 대조선 독립부인회가 통합되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결성되는 과정에서 이혜경 여사 또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회장은 우리가 다 아는 김마리아였고, 총무는 황에스터였는데, 이혜경 여사는 부회장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①국내 각 중요지점에 지회를 설립하고 회원 획득에 주력할 것 ②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문서를 인쇄해 전국에 배부할 것 ③결사대로 별동대를 조직해 상해 임정을 적극 응원하기 위해 각 방면에서 금전을 모집하고 애국부인회 대표를 상해로 파견해 임시정부에 건의서를 제출할 것 ④적십자사를 조직하고 세계에 애국부인회의 목적을 선전할 것 등 4가지를 당면 목적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실행했다.
지금까지의 독립운동은 남성중심이었고, 여성은 단지 보조적 성격을 띠었다면 김마리아, 황에스터, 이혜경 여사가 주도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전적으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자격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며 직접 실천했던 것이다. 이때 이혜경 여사의 나이가 혈기왕성한 30세였는데, 회원들의 평균연령은 더 어린 26세일 정도로 의욕 넘치는 투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2천여 명 이상의 회원을 비밀리에 확보하여 매달 1원씩의 회비를 모아 6천여 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원의 배신으로 1919년 11월 28일 일경에 의해 간부들 전원이 체포되고 말았다.
물론 이혜경 여사도 원산의 진성여학교에서 체포되어 대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1920년 6월 제령 7호와 출판법 위반으로 이혜경 여사는 징역 1년을 언도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혜경 여사는 감방 안에서도 성경반, 외국어반 등을 운영하며 수감자들에게 민족의식을 깨우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1921년 출옥 후에는 원산 마르다윌슨신학교에 교수로 복직하였고, 1년 뒤에는 3·1만세운동 때 함께 활동했던 의사 김성국과 결혼하여 대구에서 살았다. 이후에도 잠시 부산 성경학교에 복무하기도 했지만 1968년 별세할 때까지 여성의 자각과 민족운동에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2018년 5월 국립묘지로 승격된 대구의 신암선열공원에 가면 52분이 선열 중 유일하게 여성독립운동가의 묘지가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이혜경 여사이다. 김성국과 나란히 부부묘지로 안장되어 있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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