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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갖은 고문을 견뎌낸 권애라 열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4.22 20:32 수정 2019.04.22 20:32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일제 강점기 국가 멸망의 위기 속에서 여성들의 항일운동은 전근대적 인식과 사회적 상황에서 볼 때 지극히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더구나 서대문형무소처럼 모든 감옥에 고문실과 함께 햇빛조차 전혀 들지 않는 이른바 특별 감방을 설치하여 여성들에게조차 갖은 악형을 제도적으로 조장하던 일제의 강압 아래라면 말해서 무엇 하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도록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이 있었으니 그 중 한 분이 권애라 열사이다. 1897년 개성에서 태어난 권애라 열사는 아버지 권태준으로부터 큰 인물이 되기 위한 기초교육을 4~5세부터 받기 시작하여, 7살에 개성의 두을라여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애정으로 길러졌다. 이후 중등과(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명)를 졸업하고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유관순의 선배가 되어 같이 활동했다.
1917년에 이화학당을 졸업한 권애라 열사는 개성에서 유치원 교사로 활동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을 맞이하였다. 이때 독립선언서 80여 매를 호수돈여학교에서 어윤희에게 넘겨주어 주요인사들에게 배부하였고,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독립운동가와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운동을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9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는데, 여기에서 유관순, 어윤희, 신관빈, 심명철, 김향화 등의 열사들과 함께 똑바로 설 수도 누울 수도 없는 좁디좁은 감방에서 온갖 고문을 견뎌내야 했다.
1920년 출옥 후에는 한국 여성의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순회강연회를 다녔다. 이 강연회 중 여자고학생을 돕기 위한 기금 모으기 강연에서 ‘개성난봉가 소동’이라는 장안의 화제를 모은 사건이 일어났다. 강연에 참석한 종로서 형사 삼륜(三輪)이란 자가 연설을 중지시키자, 대신 ‘박연폭포’와 ‘난봉가’를 불렀는데, 갑자기 청중의 한 남자가 “신선한 연단에서 웬 기생 노래냐”고 따지자, 주위의 애국자들이 “저 놈 잡아라”라며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원래 권애라 열사는 타고난 음색과 풍부한 음량으로 어릴 적부터 노래는 물론 연설에도 능했다. 이 ‘난봉가’는 3·1운동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같이 감옥생활을 한 수원 기생 출신 김향화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이 일로 인해 권애라 열사는 또 종로경찰서에서 구류를 살아야 했고, 더 이상 국내에 있을 수가 없자 중국으로 망명을 갔다.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극동인민대회에 한국대표단 52명 중 여성 대표 4명 중 한 명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13일간 진행된 이 대회 기간 중 막간에 오락회가 열렸는데 권애라 열사는 본인 특유의 장기인 ‘개성난봉가’와 ‘박연폭포’를 불러 각국 대표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이 모습은 지켜보던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시현이 구애를 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모스크바에서 감동적인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둘은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아내와 지아비로소의 관계보다는 독립운동을 위한 사생동지를 지향하며 살았다. 여느 독립운동가의 가정처럼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도록 살림을 살아본 적도 없고 식사를 같이 한 적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슬하에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아들인 김봉년 또한 독립운동에 뛰어 들어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운동가문이 되었다. 한편 1940년 김봉년이 성년이 될 무렵의 일화이다. 아버지 김봉년이 중국으로 떠나기 전 아버지임을 알아보는 첫 부자상봉이 식물원에서 있게 되는데, 김시현은 애비 노릇을 못 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빵 더 사주랴? 무엇이든 먹고 싶은 것이 없니?” 하고 물으니, 아들 김봉년은 “제 나이가 금년 열아홉입니다. 빵이나 꽃구경보다는 독립운동을 할 일터를 주십시오.” 라고 당당히 요청했다. 그래서 그 길로 온 가족이 함께 중국으로 떠나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고 한다.
중국으로 간 아들 김봉년은 길림성에서 광복회원이 되어 영길현 소재 영신농장에서 어머니 권애라 열사와 함께 조선족 동포 청장년층에 비밀지하조직망을 구축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때 다시 모자가 함께 일제헌병대의 습격으로 체포되어, 비밀감옥에서 일명 비행기고문, 물고춧가루고문 등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 때문에 참혹하게 뼈대만 남을 정도였다. 이렇게 1년 이상 지옥보다 못 한 비밀감옥 생활 후 장춘고등법원에서 모자가 각각 12년의 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때 권애라 열사는 “24년간의 선고형량, 즉 자식 김봉년의 형량까지 대신 복역할 테니 자식 김봉년을 석방해 달라”며 선고공판문서에 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재판장이 1개월 이상 애를 태웠다는 일화를 남겼다. 이렇듯 독립운동가문 중에서 모자가 함께 투옥되어 같이 고문 받고 같이 옥살이를 한 것은 참 드문 일이라고 하겠다. 장춘형무소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던 두 모자는 일제의 패망 직전 걸어서 장춘에서 길림으로 이동하는 국도에서 극적으로 해방을 맞고 석방되었다.
악랄한 고문과 혹독한 수형생활로 억압했던 일제에 가족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당당히 맞섰던 권애라 열사의 항일 구국활동과 옥중투쟁은 더욱 빛나고 값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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