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적 제자인 오덕근 선생(1909∼?)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가은중학교 역사교사에서 1971년 3월1일자로 문경중 교사로 전입했기 때문이다.
그 때 오덕근 선생은 그 해 처음 전국적으로 시행한 주임교사 임용제에 따라 문경중학교 연구주임교사로 임용 받았다. 오 주임 선생은 1968년 3월 1일자로 문경중학교 근무 발령을 받았다. 그 전에 있던 학교는 문경시 문경읍에 소재한 문경서중학교였다. 필자가 문경중 교사로 전입하여 학급은 2학년3반 담임교사, 사무분장은 연구과 소속을 맡게 되어 과묵하신 오덕근 연구주임 선생을 가까이에서 대할 수 있었다. 오덕근 선생은 중등교사로 임용되기 전에 강원도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문교부 시행 중학교교사 자격시험(농업교사)에 합격하여 임용고시를 거쳐 중학교(문경서중)교사가 되었다.
1960년대, 1970년대만 해도 초등교장이 중등준교사 시험을 통해 늘그막에 중등교사가 되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만큼 중등교사자격시험 합격이 어렵고, 사회적으로도 중등교사를 좋게 평가하였다. 필자는 1971년 문경중학교에 전입 하자마자 교장실에 불려가, 도 지정연구학교 담당자를 맡으라는 당부를 받았다. 솔직히 필자는 교육연구에 관심이 없고, 짜깁기 연구는 질색으로 교육연구를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연구담당자 지위를 면하기 위해 사표를 내고 사립학교 진출을 한 때 꾀하기도 했지만, 필자의 적극적인 반대 입장 표명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무분장은 연구과교사로 연구교과 담당교사를 돕도록 되어 있어서, 오덕근 연구주임교사는 필자의 직속 상사로서의 위치는 변함이 없었다.
오 주임선생님은 출근하실 때 늘 노 넥타이로 헐렁한 싸구려 구호물자 양복을 착용하셨고, 신발도 구두 대신 운동화가 11호(?) 자가용이었다. 오 주임선생님은 땡! 교사였다. 오후 5시 라디오 시보에 땡! 소리가 나면 어김없이 정시에 퇴근을 하셨다. 딴 교사들이 17시30분경 퇴근길에서, 늘 장보기를 하여 한 자루 무겁게 메고 오시는 오 주임선생님과 만나기 일쑤다. 오 주임선생님의 생활태도는 의복은 수수하게 차려입어도, 음식을 통한 영양섭취를 최고로 치시고 건강을 위해 최고의 식생활을 유지 하셨다.
오 주임선생님은 조선2고보(평양고보) 출신으로 대단한 엘리트였다. 6·25때 월남하여 강원도에서 초등학교 교장은 역임하셨지만, 월남하시기 전에는 북한 시군재판소 변호사를 하셨다. 북한의 시군재판소에는 재판소별로 5명의 변호사가 있었다고 한다. 오 주임선생은 변호사 출신답게 기소장을 능숙하게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오 주임선생은 봄가을 소풍 때 꼭 도시락을 집에서 직접 챙겨 오셨다. 제자(학생)들이 거두어 온 도시락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직접 집에서 챙겨온 도시락을 맛있게 드셨다. 물은 학생들이 가져온 물을 고맙게 드셨다. 오 주임선생님은 문경 새재 밑에 산골 논이 백여 마지기 있었지만, 일손을 구하지 못해 절반 이상을 빈 논으로 묵혔다.
오 주임선생은 자기 논을 남에게 소작으로 내주었으면서도 공휴일이면 어김없이 들판을 찾아가서 일손을 도와드리고 소작인이 가져온 점심밥은 사양하고 자기가 싸온 도시락을 먹고 물은 소작인이 준비한 것을 양껏 드셨다. 오 주임선생은 평양이 낳은 애국자 도산 안창호 선생을 수범하여, 근검절약하시고 열심히 일하시는 도산의 가르침 무실역행(務實力行)을 평생 생활신조로 실천하여 도산의 제자로서 부끄럼 없는 충실한 삶을 사셨다.
필자가 오덕근 주임선생과 문경중학교에서 만 3년을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오 주임선생님의 정년퇴임식(1974년 2월 말 거행)도 지켜볼 수 있었다. 오 주임선생은 퇴임사 마지막에서 자기가 교원 노릇을 하면서 단돈 1원도 뇌물을 받은 적이 없이 깨끗한 공직생활을 했음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단1원도 안 먹었다’는 오 주임선생님의 폭탄선언에 퇴임식 임석관인 당시 이 되곤 문경교육장은 화들짝 놀라 안경을 깨뜨릴 뻔 했다.
오덕근 주임선생은 공직생활 40년 만에 오늘 퇴임식에 처음으로 양복 정장을 입고 목댕기를 매셨다고 제2의 폭탄선언을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