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되면, 지난 한해만 돌아보는 게 아니라, 지난 세월도 환하게 돌아다 보인다. 나무가 잎을 다 떨구어, 더 새롭게 클로즈업 된다.
양승찬 전우는 1961년에, 서울의 육군본부에서 처음 만났다. 군번이 필자는 앞 네 자리가 ‘1078XXXX’인데, 양승찬 전우는 ‘1083XXXX’로 나보다, 군입대가 100일 정도 늦지만, 상등병과 병장은 같이 진급하여 허물없는 사이로 터놓고 지냈다. 양승찬 병장이 전우로 평생 각인된 것은, 성격이 온순하고 과묵하며, 육본교회에 같이 다니는 믿음의 벗이기도 해서다.
필자는 자원입대하여 양병장보다 100일 선임이지만, 나이는 필자가 두 살 아래였다. 군인정신이 덜 들은 탓이었는지, 많은 휴매니티 탓인지, 필자는 턱없이 낮은 군번의 졸병에게도 깎듯이 경어를 구사했다.
그 때 1962년 필자(김시종 병장)는 동아일보 시조란에도 네 번이나 입선이 되어, 육본병영사회에서 꽤 명물이었다.
전 후방 할 것 없이 겨울은 병사에겐 시련의 계절이다. 겨울이 되면 사무실 난로점화는 졸병 몫이었다. 평소에 부대주변에 나무토막이 보이면 불쏘시개로 쓰기 위하여 은밀한 장소에 은닉(매복)시켰다.
난로당번이 되는 날엔 새벽4시에 일어나, 사무실에 나가 전날의 묵은 재를 비우고 난로를 피워야했는데, 혼자 잔득 재가 담긴 쇠난로를 빙판길에 들고 다니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일과를 마치고도 내무반으로 돌아가지 않고, 잔불을 지펴, 난로를 더욱 무겁게 한 고참병들이 고와 보일 리 없다. 필자가 난로당번이 되는 날은, 고참병들이 오늘 난로당번이 누구냐고 씹었다. 난로 당번날이 두려웠다.
그러던 차, 다시 필자가 난로당번이 되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맞은편 침상의 양승찬 병장이 일어나, 나의 손을 잡으며 같이 사무실로 향했다. 양승찬 병장이 난로당번 주역이 되고, 나는 조수가 되어 거들었다. 난로를 활활 피우니, 사무실도 따뜻하고 난로불에 물을 데워 사무실 청소까지 하니 오늘 청소 만점(100점)이요 였다. 그 뒤로도 양승찬 병장은 필자 난로 당번날을 잘 챙겨주었다. 필자도 염치를 세우려고, 양병장 난로 당번날 동행하려 했지만, 한사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충남 금산에서 양 병장은 1940년에 태어난, 용띠 대장부였다. 제대를 몇 달 앞두고 필자가 육본을 떠나게 되어 양승찬 병장과도 기약 없는 작별을 했다.
그해(1963년) 3월 20일에 서울 수색 30사단 사격장에선, 애인의 연애편지를 공개하고 놀려댄 상급자 정방신병장과 고한규 상병을 사살한 최영오 일병의 총살형이 집행됐다. 그 날 최 일병의 모친 이순자 여사는 아들 대신 자기가 죽는다며 마포 한강에서 투신자살했다. 신문과 라디오를 달구었던 최영오 일병의 하극상 사건은 법대로 엄중하게 처리가 됐다. 군복무 기간중에 있었던 쇼킹한 사건이었다.
필자도 양승찬 병장도 바로 위의 고참병들이 무도하고 악질적이어서 아무 잘못도 없이, 한 주 한 차례 매타작(배트세례)을 당했다. 매우 치는 열대(십도)를 어김없이 맞았다. 군 복무 중 구타당한 배트질이 도합 천 대를 웃돌았지만, 최영오 일병 같은 결단성이 없어, 방아쇠에 손가락도 못 대봤다. 어차피 세월은 흘러가고, 옛말 그대로 참는 것이 어른인 것이다.
필자는 1963년 10월 초, 만 34개월 복무하여 육군병장으로 만기제대를 했고, 양승찬 병장은 하사진급을 하고, 1964년 1월경에 만기제대를 한 것 같다. 양승찬 병장의 전우애 덕분에 난로당번 노이로제에서 해방됐던 것도 벌써 만 56년. 인간성이 무던하던 양승찬님은 어디에서 사시던 좋은 인성덕분에 행복하게 인생을 사셨을 것이다.
꼭 한번 이 세상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 양승찬 병장님! 양 병장님은 나의 영원한 은인이시오, 지금까지 필자의 가슴에 따뜻한 난로가 되어 주었다. 비록 1차 작별한 뒤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양승찬 병장님! 당신은 어디에 계시던 나의 영원한 전우이십니다.
진정으로 만수무강을 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