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찾는 데에는 여성도 남성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의식 아래 독립자금모집, 독립전쟁에 대비한 간호사 양성, 청소년 교육, 독립정신 고취, 계몽활동, 첩보활동, 방송활동, 국제선전, 임시정부 요원들의 뒷바라지, 그리고 가족돌보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방법이 있다.
물론 이러한 활동들은 모두 과감한 조직력과 불굴의 투쟁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즉 어쩌다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쇠락의 길을 걷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또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에 진정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투쟁해 왔던 분 중 황에스터 여사 역시 그러하였다.
황에스터 여사는 일명 애덕(愛德)·애시덕(愛施德)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1892년에 평양 외성의 한학자의 가문에서 7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옳은 일에는 기어이 실천하고 마는 강직한 성격이어서, 부모가 두 동생은 학교에 보내고 자신은 집안일을 시키자 단식투쟁으로 기어코 평양의 정진여학교 3학년에 입학 허락을 받아내기도 했다. 15세에는 서울의 이화학당으로 입학하여 19세인 1910년에 졸업 후 곧장 평양의 숭의여학교 교사로 부임해서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13년 숭의여학교 근무시절에는 동료 교사 김경희와 교회 친구 안정석과 더불어 비밀결사대인 송죽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애국사상이 깊은 학생 20여 명을 엄선해 동지회원으로 규합하고 정신교육을 시행한 후 송죽회의 전국적인 자회 설립까지 지도하였다. 이들의 비밀조직은 회원가입의 엄격성과 투철한 구국의식으로 일제의 경찰망에 잡히지 않으려 무진장 애쓰면서 군자금을 마련해 중국의 독립운동기지에 송금하였다. 이들은 월 30전의 회비 이외에 자수를 놓아 마련한 특수회비로 군자금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1918년에는 선교사 홀(Hall,R.S.)의 권유로 일본의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김마리아 등을 만나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하고는 배일사상 고취와 애국심 고양에 노력하였다.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대두되자 여성도 독립운동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며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황에스터는 “우리의 조국은 결코 남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수레는 한쪽 바퀴만으로 달리지 못 한다”며 여성의 참여를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황에스터는 주동자 대부분과 함께 검거되었다가 학생신분이란 핑계로 곧 풀려나기도 했다.
황에스터 여사는 동경에서만의 2·8선언이 되어서는 안 되고 국내의 모든 여성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국내에 들어와 보니 이미 분위기는 3·1운동 준비로 분주한 상태였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하여 여성동지들을 끌어 모아 독립운동 여성조직을 발기할 것을 김마리아 등과 협의하였다. 그리고는 3월 2일부터 각 학교의 휴교와 남학생들과의 연계를 통해 3·1운동 지원, 독립운동자금마련에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할 여성대표인 신마실라의 비용을 마련하고자 일본여인이나 노파로 변장하는 등의 작전을 통해 지방 연고지를 찾아다니며 상당한 액수를 준비하여 신마실라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그의 행적을 추적하던 일경에 체포되어 8개월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출옥 후에는 활동이 지지부진하던 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기로 하고, 전국에 걸쳐 펴져 있는 송죽결사대의 조직을 적극 활용하여 1919년 9월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확대개편하고 총무의 직에 올랐다. 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군자금보집보다는 독립전쟁 준비에 주안점을 두고 국외의 무장독립운동세력을 임시정부로 집결시키는 데 힘썼으며, 이의 실천을 위해 적십자장, 결사장이라는 부서를 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12월말 일제의 수사망과 동지의 배신으로 발각되어 본부와 지부의 임원들과 회원들이 모두 검거되고 말았다. 황에스터 여사 역시 검거되어 대구경찰서로 넘어가 3년형의 징역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감옥에서도 동포 죄수들을 선도 계몽하였고 가출옥한 뒤, 이화학당 대학부를 졸업하고는 모교의 사감 겸 교사로 봉직하였다.
1925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해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를 받고 1928년 귀국한 뒤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추진하였다. 당시 1920~30년대의 한국 농촌은 심히 피폐되어 있었다. 농민들은 일본인들에게 토지를 박탈당하고 부채에 허덕이는 등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고자 감리교 여자신학교의 농촌사업지도교육과 과장에 취임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농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는데, 이들 학생 중 김로득과 최용신 학생이 가장 우수하였다. 특히 김로득은 용현에, 최용신은 수원 샘골에서 농촌계몽운동에 몸을 투신하였다.
일제의 감시가 여기서도 계속되자 황에스터 여사는 1930년 혼인 후 남편과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인 농장에서 고생하는 교포들에게 애국적인 계몽운동을 계속하였다. 해방이후에도 황에스터 여사는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여성문제 타결에 노력하는 등 끊임없는 교육활동을 하다가 1971년 78세를 일기로 위대한 삶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