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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한 최덕지 선생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3.31 19:39 수정 2019.03.31 19:39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일제는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한국인들에게 황국신민화를 강요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종교와 유사한 모습을 띄면서 한국 기독교 여성들과 갈등을 유발하였는데, 특히 신사참배 강요에 기독교 여성들은 목숨을 걸고 이에 항거하였다.
기독교가 일제 식민통치기에 받은 3대 박해는 1911년 신민회를 해산한 105인 사건, 1919년 3·1운동, 그리고 민족말살 통치시기에 자행한 신사참배 강요사건이 꼽히는데, 이 와중에 지독하게 일제에 항거한 대표적인 여성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최덕지 선생이다. 당시 남성들이 운영하던 기독교 총회가 신사참배에 무참히 무릎을 꿇은 반면, 최덕지 선생을 비롯한 여성들은 조금의 굴함도 없이 당당하게 이에 저항한 사실을 비추어볼 때 이 땅의 독립운동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최덕지(1901-1956) 선생은 1901년 6월 25일 경남 통영에서 출생했다. 부친 최익문(겸)과 모친 김처녀 사이의 무남독녀로서 비교적 경제적 어려움 없이 성장하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통영갓을 부친이 만들면서 꽤나 수입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정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최덕지 선생이 차츰 민족의식을 자각하게 된 것은, 그가 출생하고 자란 지역이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유곽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이어서 지속적으로 차별의식을 느끼고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조모와 모친 덕분에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기독교 사상 및 통영대화정교회에서의 민족적 인물과의 교류를 통해 민족의식을 형성하였으며, 이후 진명학원에서 받은 4년 동안의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완전히 각성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민족의식과 기독교 사상으로 무장한 최덕지 선생은 통영의 여성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1916년 진명학원을 졸업한 최덕지 선생은 1917년에 마산의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였고, 여기서 민족주의적 여성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았다. 이때 1919년 3월 13일 통영 만세사건이 일어났는데 최덕지 선생은 태극기를 직접 제작하는 데 지원을 하면서 직접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20년대가 되면서 최덕지 선생은 민족운동을 위한 여성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교회, 유치원, 야학을 통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주의적 여성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상해독립단 통영원조회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보내고, 통영여자청년회, 근우회 통영지회, 통영부인회에도 참여하는 등 통영에서 조직된 거의 모든 여성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통영에서의 왕성한 활동을 통해 최덕지 선생은 여성지도자로 부상하여 여성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최덕지 선생을 더욱 여성의 민족운동에 매진하게 한 것은 1932년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이 학교는 철저하게 기독교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고, 신앙을 조직하고, 체계를 세우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따라서 최덕지 선생은 한국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기독교 가르침의 실천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최덕지 선생은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하나님뿐이라고 여기고, 교회 일을 통한 민족운동에 매진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기독교계에 공식적으로 신사참배에 따를 것을 강요했다. 이에 1938년 장로회 제27차 총회에서는 “솔선수범하여 신사참배를 행하고 자진하여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에 참가함으로써…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도록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이후 기독교인들의 부일협력은 극에 달하여 징병세, 정신대 독려 연설, 자동차 및 비행기 헌납 등의 행렬이 뒤를 이었다.
이에 반하여 여전도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의 강압에 반대하고 나섰고 지방에서는 특히 최덕지 선생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항거운동을 일으켰다. 그 방법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기독교의 성경말씀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즉, 신사참배한 현 노회를 해체하고, 그런 목사에게 세례 받지 않으며,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들만으로 노회를 조직하는 한편, 교회와 성경학원을 중심으로 한 조직을 전국화 하여, 각종 부흥회를 통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옥중 투쟁도 집요하게 진행하였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총 4차에 걸쳐 구속된 후 감옥에서의 금식기도와 예배를 통해서 목숨을 잃을 정도까지 싸우고 또 싸웠다. 이를 통해 최덕지 선생은 많은 기독교인들의 본보기가 되었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처럼 남성들보다 더 지독하게 민족의 독립을 위해 그들이 요구하는 5대 민족말살정책인 신사참배, 동방요배(황거요배), 정오묵도, 황국신민서사낭독, 일장기 국기배례의 다섯 가지를 끝까지 반대한 최덕지 선생에 대해 뒤늦게나마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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