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청산 논쟁이 뜨겁다.
해방 이후 미완성으로 남은 친일잔재청산이 오래 미뤄둔 숙제라는 대통령의 3?1절 100주년 기념식 경축사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둘러싼 정치권의 논쟁 등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은 양 갈래로 나뉘어 힘겨루기 중이다.
이에 질세라 소위 전문가들을 중심으로는 역대급 최악의 상황인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서 일본을 더 이상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며, 이 같은 논쟁 자체를 양비론(兩非論)으로 비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역시 일본은 우리에게 먼 나라일 수가 없는 것 같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면 어그러질 대로 어그러진 한일관계가 대한민국에 결코 이로울 게 없다.
우선 외교안보적 차원에서 북핵문제 해결과 통일을 위한 동북아의 지형에서 일본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미국에 대한 일본의 접근성과 영향력은 우리보다 몇 수 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국을 통한 유럽, 일본을 통한 아시아라는 미국의 외교 전략의 큰 틀은 한반도와 동북아에 일본의 존재감이 결코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경제와 문화적 차원에서도 대한민국과 일본은 서로 주고받을 것이 매우 많다.
한일 양국은 지난 수십 년간 매우 효율적인 주요 산업생태계의 상생관계를 구축했다. 또 최근 몇 년간 우리 국민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나라가 일본이다. 매년 700만 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홋카이도부터 오키나와까지 일본 곳곳을 방문하고 있다. 또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도 25%이상 증가했다. 이제 행복한 얼굴로 우리 맛과 멋을 즐기는 일본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일본은 이미 대한민국과 한반도에 매우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고, 이러한 파트너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 우리에게 이로울 리 없다.
하지만 악화일로에 있는 한일관계를 개선하자는 진정어린 목소리들은, 혹여나 친일 프레임의 덫에 걸릴까 잔뜩 웅크려 있는 형국이다.
한일 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기사들과 의견들은 당신 친일파지, 당신 매국노지 하는 험악한 댓글들로 도배되기 십상이다. 이는 친일의 경력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인사들이 한일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국민들의 경계심과 의심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친일의 잔재가 한일관계를 위한 새로운 노력을 막고 있는 현실, 전형적인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형국이다.
이제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이루기 위해 더욱 절실해진 한일관계의 개선을 위해서 친일잔재청산의 숙제를 하루빨리 끝내야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일본이라는 파트너에게 당당하게 손을 내일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서다.
같은 민족의 피와 눈물을 밟고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추구했던 친일파들과, 뉘우침 없는 그 후손들이 버젓이 우리 사회의 주인과 어른 행세를 하는 한, 평화와 통일을 위해 일본을 배려하고 이해하자는 목소리가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리 없다.
솔직히 오늘날 일본의 극우세력들과 혐한파들이 쏟아내는 어처구니없는 발언들과 행태들을 보고 있자면, 그들이 대한민국을 일본의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기다릴 것이다.
노자는 고요함은 조급함의 주인(靜爲躁君)이라고 했다. 역대급 최악의 한일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조급하고 어설픈 노력보다는 뜨거워진 한일관계를 식히는 시간, 고요함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그 고요한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 안에 남은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숙제를 말씀하게 풀어내어 우리 안에서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새로운 담론과 실천의 공간을 확보하면 되는 것이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서독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부전선이 이상 없음을 먼저 확인하고 러시아와 한판 승부를 벌인 것처럼, 우리도 중국과 통일을 위한 한판 승부를 벌이기 위해서는 일본과 미국으로 이어지는 동부전선을 확실히 해야 한다.
하지만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인 동부전선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미 간의 동맹의 균열을 걱정하는 목소리이며 또 악화일로에 있는 한일관계를 걱정하는 목소리다. 그래서 어떻게든 한일관계를 정상화해야 하며 일본을 자극할 친일잔재 청산은 적당히 덮고 넘어가는 게 현실적이라는 주장도 들린다.
걱정은 정당하지만 해답은 틀렸다.
진정으로 미래지향적이고 동반자적인 한일관계는 개인의 탐욕과 부끄러운 과거를 덮어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발전적인 한일관계를 원하는 이들의 진심이 친일파로 몰릴 염려가 없어질 때야만 가능하다.
그럴 때 우리 국민들도 의심의 눈초리를 내리고 일본을 향한 새로운 관계를 바라게 될 것이다.
이제 오랫동안 묻어서 피부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친일의 때를 빡빡 씻어 버려서,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한일관계의 새살을 돋우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