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말’이라는 의사소통 수단을 갖고 있다.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식물도 어떤 방법을 통해 의사소통 하지만 우리처럼 ‘말’로 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것으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 감정 등을 상대에게 전한다. 이웃에게는 물론 주위의 모든 사물에 이르기까지 매일 이것을 사용함으로써 삶을 영위하고 있다. 입을 통해서, 손을 이용해서, 눈빛이나 몸짓으로 또는 문자를 사용해서 수시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그런 표현의 가장 정확하고 손쉬운 방법이 ‘말’이므로, 사람은 어쩌면 ‘말’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 주는 의미는 우리의 상상 이상의 함의를 가지고 있다. 스님이 ‘묵언수행(默言修行)’을 한다할 때, 수행에 이르는 큰 인내가 단순히 ‘말’하고 싶음을 참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음을 의미하고, 친구와 다투었음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으로 “그 친구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때도 단순히 ‘말’이라는 의사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절교’라는 극단적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말’은 다양하게 우리의 일상생활에 너무나 가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기에 어쩌면 어느 순간에 그 존재의 가치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심코 던진 이것으로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지, 나도 모르게 당연시하는 이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은지 곱씹어 볼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20여 년 동안 지금껏 대학 강단에서 영어강의를 하는 친구가 지난 해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며 어느 모델대회에 참여하겠다고 내게 도와달라는 ‘말’을 해왔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생소한 어떤 일에 도전하는 모습이 아름다웠기에 흔쾌히 재량껏 돕기로 마음먹었다. 이미지메이킹, 워킹, 마사지, 의상, 소품 등에 이르기까지 내가 아는 한 조언과 시연을 해보이기도하면서 머리를 맞댔다.
그런데 본선 대회를 단 이틀 앞두고 최초의 공고와는 다른 변경된 제시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갑자기 포기선언의 ‘말’을 주최 측에 해버렸다고 하였다. 대회 임박해서 내린 결정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친구에게 약간의 쓴 ‘말’을 했었다. 친구는 자신을 이해 해 주기 이전에 대회주최 측의 입장만을 두둔한다고 여겼는지 순간의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급기야 내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말’들을 해왔다.
오랜 시간을 함께 나눈 우정이 한꺼번에 허무하게 날아가는 느낌이었고, 그 서운했던 충격의 ‘말’은 아직도 가슴 한 구석을 시리게 한다.
얼마 전 방학을 이용한 자기계발시간을 가지기 위해 2주간의 어떤 재활프로그램 자격연수에 참여 한 적이 있다.
대구·경북권의 신청자들로 일반인과 재활관련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주를 이뤘다. 다양한 연령층의 학습자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인데도 전문용어의 사전설명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 수업내용을 금방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터에 가르치는 교수의 문장 끝 부분 또렷하지 않은 발음의 ‘말’을 듣고 있자니 답답함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그날 점심시간에 들른 인근 식당에서 건너편 테이블에서 나누는 ‘말’이 내 귀에 쏙 들어왔다.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하고 어떤 아이가 묻자 “응 심혈관계에서 이상이 올 수도 있고 암을 유발할 수 있는 물질이므로 먹는 걸 신경 써야 해”라고 대답하는 대목이었다.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테이블을 봤더니 학령기 이전과 초등저학년으로 보이는 자매가 나누는 대화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또박또박 나누는 ‘말’뜻의 정확성이 나를 놀라게 했다. 강의에서의 불만을 보상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의사표현을 하는데 있어서는 ‘말’을 사용하는 현상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며, 학력이 높거나 낮으냐를 막론하고, 재력을 지녔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일을 잘하거나 못하거나를 떠나서, 사회경력이 다소에도 관계없이 모두 ‘말’을 사용하여 목적한 의사를 전달한다. 그러나 ‘말’은 누구나가 표현의 수단으로 많이 이용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가 잘 쓸 줄 안다고는 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진다. 단지 ‘말’은 소리를 전달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며, 전달하고픈 의미를 정확히 드러내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올바른 생각이 들어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은 우리들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의 마음대로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골라 쓸 수는 있되,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제대로 된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올바른 좋은 말을 하도록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