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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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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1.13 18:03 수정 2019.01.13 18:03

김 시 종 시인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민족사관(民族史觀)의 단재 신채호는 명저 삼국사기의 편찬책임자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단호하게 몰아 세웠다.
신채호는 국운이 비색한 한말과 일제치하에 살았기 때문에, 시대고(時代苦)를 극복하기 위해 보편성과 다소 거리가 있는 특수한 시각으로 지난 역사를 보았다. 김부식의 쾌저 삼국사기를 비하한 것은, 삼국사기가 신라중심이고 사대주의적이라 단정한 때문이다.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통일 위업을 왜소한 역사적 사건이요, 있어선 안 될 역사로 과소평가하고 있다.
신라가 당의 세력을 끌어들여 동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무찌른 것은 사대주의의 극치라고 비하한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무렵 3국은 동족 국가인가?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도 3국을 동족국가라고 인식한 나라는 없다. 신라가 어렵사리 3국 통일을 이룩함으로 신라 문화의 기반위에 고구려·백제의 문화를 아울러 민족문화를 비로소 이룩하게 된다. 신라가 삼국통일 함으로 비로소 한민족이 형성된 것이다.
신라가 나·당동맹(648년)을 맺은 것은 고구려·백제 두 나라의 강압과 침공에 못 이겨, 신라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나·당 동맹결성 이었다. 백제의 윤충 장군이 642년 신라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켜 성주 김품석과 부인·아들 일가족은 몰살 당하고, 시신마저 장례도 못 치르고 볼모로 삼은 비인도적인 일이 자행되었다.
선덕여왕 때 왕족인 김춘추는 개인의 비극과 국가안보(신라)를 위해 고구려와 당나라 방문을 서슴치 않았다. 김춘추가 나당동맹을 성립시킨 것은 대단히 주요한 외교적 성공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와 국교를 열고 12년 만에 백제를 아우르고(660년), 668년에는 고구려마저 합병하게 되었다.
고려 인종 때는 학문이 융성하여 지방중요관립교육기관인 향학(향교의 전신)이 성립되고, 삼국시대를 통람할 수 있는 삼국사기(1145년)를 김부식이 편찬하게 된다.
삼국사기의 편찬 책임자 김부식은 이름난 유학자요, 당대 거유(巨儒)였지만, 다른 편찬위원들도 당대 일류 학자요 고관대작으로 집필진이 탄탄했다.
삼국사기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열전(列傳)에, 삼국통일의 으뜸 공로자 김유신의 전기가 전체 열전 분량의 3분의2가 넘는다. 김유신 장군을 클로즈업시킨 것은, 김부식이 신라왕족의 후예이기 때문이 아니라, 신라 삼국통일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신라 첨해왕 때 왕족 석우로는 금성(경주)에 침입한 왜병과 싸우다 사로잡혀 화형을 당한다. 신라의 국력이 얼마나 미약했으면 왕족이자 장군인 석우로가 신라 서울 서라벌에서 산채로 화형(火刑)에 처해졌을까.
왜국(일본)은 신라의 안보에 암적인 존재로, 신라의 경향을 시도 때도 없이 무시로 짓밟았다. 소년무사단 화랑도들의 수련코스가 동해안이 주 무대인 것은 경치가 빼어나서가 아니라, 신라에 침입한 왜병들을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신라 눌지왕 때 왕제 미사흔(미해)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는데, 눌지왕이 동생 미해를 그리워하자 충신 박제상이 일본에 위장 귀순하여 일왕을 안심시킨 뒤 미해를 신라로 돌아가게 하고, 박제상 자신은 붙잡혀 목도(쓰시마)에서 화형을 당했다.
일본의 사기 ‘일본서기’를 보면, 신라 침공기사로 두꺼운 책이 도배되다시피 됐다. 신라에 일본의 침공이 뜸해진 것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676년) 때부터다.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여 국토면적은 13만㎢나 되고, 국민도 45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국가가 안정되고 국민도 전란에 덜 시달리게 된 획기적 역사의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신라가 친당외교수립에 성공하고 고구려·백제를 아우른 것은 합리적인 정당방위요, 생존권 차원의 살아남기 위해 한 부득이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의 신라 삼국통일 위업 비하는 역사를 보는 눈이 단순함을 강조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삼국사기’가 제대로 기록되기 위해서는 좋은 기록(서적)을 많이 남긴 유공자가 있음을 익히 알아야 할 것이다.
신라 통일기 성덕왕 때 김대문(金大問)은 귀족이요 대학자였다. 704년엔 오늘날 경기도 도지사격인 한산주 도독이 되었다. 김대문은 단순한 고관대작이 아니라, 당대 제일의 저술가요 문장가였다. 그가 지은 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악본(樂本)·계림잡전·한산기 등은 오늘날 실전(失傳)이 되었지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는 남아 있어서 삼국사기편찬의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김부식이 혼자 잘나서 ‘삼국사기’가 이 땅 역사의 고전(古典)이 된 게 아니라, 김대문 같은 선각적 국학자가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모든 기록이 다 소중하지만, 그 중에도 삼국사기 열전(烈傳)의 온달(溫達)은 백미(白眉)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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