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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중국대륙을 누빈 불멸의 여성독립운동가 이화림 선생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1.06 13:08 수정 2019.01.06 13:08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묻힌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발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잊힌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널리 알리는 일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잊히고 묻힌 여성 독립유공자 가운데 한 분으로 이화림(본명 이춘실) 선생을 들 수 있다.
이화림 선생의 이름 석 자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선생의 증언을 토대로 2015년 ‘이화림 회고록’이 중국에서 출간된 것이 계기가 됐는데, 충남연구원의 박경철 박사 등이 이 회고록을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하면서 국내에도 비로소 알려지게 됐다. 선생이 가신지 16년만의 일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인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화림 선생은 1919년 3·1운동 참가 후 1927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한글학자인 김두봉의 소개로 백범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담했으며, 이때 김구 선생과 나눈 이화림 여사의 첫 대화는 다음과 같다.
“너의 조국은 어디인가?”
“나의 조국은 조선이고,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지금에야 밝혀졌지만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서 조력자로도 활동 하였다.
이봉창 의사의 일왕 암살시도 의거 때는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당시 거사 준비를 마친 이봉창에게 고민이 있었는데 준비한 폭탄을 어떻게 일본까지 무사히 숨겨 가지고 갈 것인가가 큰 문제였다. 백범 김구와 이 문제를 논의하던 중 이봉창의 머릿속에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건 바로 바짓가랑이에 속주머니를 만들어 폭탄을 넣고 꿰매는 것이었다. 이때 이봉창이 손으로 가리킨 아랫도리를 보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떨군 이화림 선생을 향해 백범이 웃으면서 말했다.
“동해(이화림의 상해시절 가명)야, 부끄러워하지 마라. 혁명 활동을 하는 데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 네가 이봉창 동지에게 주머니를 만들어주기 바란다.”
이렇게 하여 이봉창은 이화림 선생이 만들어준 주머니에 폭탄을 넣어 무사히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거사 때는 한인애국단 여성대원으로서 윤봉길과 함께 부부로 가장하여 거사 장소인 상해홍구공원을 며칠 전부터 현장답사를 하며 치밀한 작전을 짜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막상 거사 당일 이화림 선생은 식장에 함께 들어가지 않고 공원 입구에 숨어서 윤봉길이 입장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봐야만 했다.
이화림 여사가 이 날 윤봉길과 함께 공원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이화림 여사는 중국어는 능통했지만 일본어가 서툴렀는데 혹시나 신분이 들통 나서 중대한 거사를 망칠까봐 백범이 적극적으로 동행을 말린 때문이었다. 덕분에 결국에는 성공을 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의거가 될 수 있었다.
윤봉길 의거 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백범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해를 떠나 가흥 방면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이화림 여사는 이들과 동행하지 않고 조선독립과 혁명을 꿈꾸는 젊은 청년들이 운집한 광주로 향했다.
여기에서 1936년 의열단원 윤세주의 연설에 감화하여 민족혁명당 입당 후 당 부녀국에서 의료보건사업 책임자로 활동하였고, 1939년 계림으로 가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 부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1년 화북지방 태항산 지구 팔로군 항일근거지에서 항일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때 여성대원들은 전투와 선전활동은 물론 남성대원들의 식사준비까지도 맡았다. 그해 혹독한 가뭄으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는데, 특히나 산중에서 소금이 귀해 염기성이 많은 돌을 갈아 산채에 비벼먹을 정도였다. 산채라고 해봐야 산에서 나는 돌미나리가 고작이었지만. 또 1944년 연안으로 가서 화북조선독립동맹 주석 김두봉 휘하에서 활동하였으며, 1945년 무정 장군의 지원으로 중국의과대학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던 중 연안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중국에 남아 의사로서 헌신하던 선생은 중국에서 심양의사학교 부교장, 중국 교통부 위생기술과 간부 등을 지내다가 1999년 2월, 95세를 일기로 별세 하였다.
이화림 선생은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드물게도 항일투쟁 일선에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 시절에는 김구 주석의 비서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의 행적 및 활동상은 ‘백범일지’에서조차도 한 줄도 언급돼 있지 않다. 자세한 이유는 알 길이 없으나 아마 공산주의 활동을 한 행적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백범의 모친상 때 백범과 주고받은 일화 한 토막으로 나머지를 추정할 뿐이다.
“동해야, 너 아직도 공산주의자냐? 공산주의를 믿느냐?”
“저는 공산주의자를 믿습니다. 저는 공산주의자입니다.”
“그럼, 우리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말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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