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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눈물 젖은 두만강’의 주인공 주세죽 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12.13 20:15 수정 2018.12.13 20:15

김 지 욱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주세죽 여사는 1901년 함경남도 함흥의 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함흥의 영생여학교 고등과에서 2년 다니다 서울로 올라와 중등학교에 진학했다. 지방출신의 여학생이 서울까지 유학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집안이 비교적 부유했으리라 생각된다.
1919년 중등학교 시절 함흥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학업을 중단하게 됐다. 이 일로 1개월 동안 유치장에 감금되었으며 공소가 끝나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뒤 함흥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했고, 1921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병원에 근무하던 주세죽 여사는 1921년 4월 중국 상해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안정씨여학교에 입학해 1년 동안 영어와 피아노를 배우면서 사회주의를 처음 접했고, 6월에는 사회주의 청년단체인 상해 한인청년연맹에 가입했다. 나중에 숙명의 배필이 될 2명의 사회주의자 청년 박헌영과, 김단야를 여기서 만났다.
1년 후인 1922년 5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주세죽 여사는 1924년 박원희, 정종명, 김필애, 정칠성 등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했는데, 이 단체는 종래의 계몽적 여성교육론을 비판하고 사회주의적인 여성해방론을 주장하였다.
상해에서의 인연을 맺은 두사람 중 먼저 인연이 닿아 결혼한 상대는 박헌영이었다. 1924년 11월 7일 박헌영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 부부가 되었다.
농촌계몽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작가 심훈은 1930년 ‘동방의 애인’이라는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중국 상해에서 조선혁명을 위해 활동하던 청춘 남녀들의 인간관계와 사랑을 그린 이 소설은 박헌영과 주세죽 여사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심훈과 박헌영은 경성고보 동창으로 중국 유학을 비슷한 시기에 떠났던 것이다.
1925년 1월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해 개회선언을 하고 강령과 규약을 기초했으며 집행위원이 되었다. 2월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4월 고려공산청년회 결성대회에서 중앙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다가 11월에는 ‘제1차 조산공산당사건’, 이른바 ‘신의주 사건’으로 주세죽 여사는 김재봉, 박헌영을 비롯한 당과 공산청년회 간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박헌영은 감옥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조직책과 동료들의 은신처를 불지 않았다. 주세죽 여사는 약 3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6·10만세 배후인물로 몰려 더욱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결국 박헌영은 의식을 잃고, 심각한 공황상태에 빠졌으며, 1927년 11월에는 정신병자로 인정받아 풀려났다. 그리고는 1928년 9월 남편 박헌영과 함께 함흥에서 청진을 거쳐 두만강을 넘어 일제경찰의 추적을 피해 소련으로 탈출했다.
이 두만강을 탈출하는 장면을 보고 가수 김용환(김정구의 형)은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으로 시작하는 국민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노래로 만들어서 온 국민의 가슴을 적시게 했던 것이다.
주세죽 여사는 박헌영과 딸 비비안나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정치망명가들을 위한 집에 살면서, 한편으로는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동방근로자대학에 다니기도 하는 등 모처럼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당 재건운동을 위해 1932년 1월 상해로 떠났던 박헌영이 1933년 7월 일경에 체포된 뒤 3, 4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자 1937년 김단야와 재혼했다. 그 무렵 김단야 역시 아내 고명자가 행방불명이 되자 홀아비 신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세죽 여사의 인생은 그다지 녹녹치 않았다.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바람이 불자 김단야는 일본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고, 주세죽 여사는 카자흐스탄으로 5년 유배형을 받았다. 이 기간 중에 김단야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 김비탈리아도 잃었다.
1945년 8월 카자흐스탄에서 일제의 패망소식을 접한 주세죽 여사는 자유의 몸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된 조국으로든, 17세 된 사랑하는 딸이 기다리고 있는 모스크바든, 어디로든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보냈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리고 해방 공간에서 주요 인물로 떠오는 전 남편 박헌영과의 재결합도 기대했지만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에는 모스크바에 있는 딸을 만나러 가다가 도중에 폐렴에 걸려 의식을 잃고는 딸 얼굴도 보지 못하고 숨지고 말았다. 이때 나이가 52세였다.
재결합을 기대했던 전 남편 박헌영도 북한에서 부수상 겸 외상으로 김일성 다음으로 2인자까지 되었지만, ‘미제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1956년 12월 평양 변방의 야산 기슭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내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다. 참으로 애석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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