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거대한 민족운동으로 발전시킨 원동력은 남녀노소 누구나 평등하게 국민이 된 의무를 담당해야 한다는 근대 평등의식이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녀평등 의식의 성장은 여성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이끌어냈다.
서울과 평양 등을 기점으로 삽시간에 전국으로 전파되어 거국적으로 전개되었던 3·1운동은 그 만세시위 과정에서 반드시 남녀가 함께 움직였다. 특히 개성에서는 남성들이 용기가 없어 망설이고 있을 때 여성의 몸으로 직접 만세시위를 이끌어낸 교회 전도사 어윤희 선생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개성 지역의 자존심을 살린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윤희 선생은 1880년 6월 20일 충북 충주에서 어현중의 무남독녀로 태어났으며, 9살이 되면서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기 시작해 ‘대학’까지 공부하는 등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선생은 아버지가 특별히 강조했던 “말은 충성되고 신용있게, 행실은 착실하고 남을 공경하라!(言忠信 行篤敬)”란 글귀를 가슴에 새겨 이를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12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894년 16살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선생이 결혼한 1894년은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의 발발로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위기에 처했던 해였다. 결국 어윤희 선생의 남편은 이 시기에 동학군이 되어 결혼한 지 3일 만에 집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하여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이후 어윤희 선생은 시댁을 떠나 본가에서 아버지와 살던 중 1897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혈혈단신의 외로운 몸이 되었다. 이에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로 마음을 먹고 고향을 떠나 황해도 평산, 해주 등지를 전전하다가 1909년 무렵에 경기도 개성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갬블이라는 선교사의 추천으로 개성의 미리흠여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재학시절에는 신학문을 접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선생은 교육운동에도 관심을 가져 개성동부교회 부속학교의 교사로 활약하였고, 미리흠여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호수돈여학교에 입학하여 35살이 되던 1915년 3월에 졸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후 학교를 졸업하고는 외딴섬에 살고 있는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전도활동과 더불어 애국사상을 깨우쳤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개성 지역에도 3·1운동의 혈맥이자 심장과도 같은 독립선언서가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지방의 중요도시에서 만세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을 때도 개성에서는 독립운동선언서를 배부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위험하고 중차대한 일이었으므로 용기를 내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3·1운동의 정보가 타 시도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성의 남성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 이러한 이야기를 제일 먼저 접한 이가 개성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유치원 교사 권애라였다. 그가 바로 북부예배당 전도사였던 어윤희 선생에게 이에 대해 의논하자 선생은 “그처럼 선언서를 배부할 사람이 없다면 내가 독립선언서에 찬성하므로 이를 배부하는 역할을 맡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예배당 지하실에 꼭꼭 숨겨두었던 독립선언서를 받아들고는 3월 1일 오후 2시경에 당당하게 팔에 걸고 개성 북본정에서 남대문까지에 이르는 길을 행진하며 통행인에게 배부하였다. 이때 어윤희 선생이 보따리 장사를 가장하고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돌리며 다니자 기숙사 2층에서 그 대담한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교사와 상급생들이 용기를 내고, 사감 신관빈과 장님 전도부인 심명철 등이 따라나서 선언서를 돌릴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드디어 3월 3일 오후 2시부터 개성의 만세시위운동이 개시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윤희 선생은 3월 3일 예배를 마치고 귀가 후 곧바로 체포되어 헌병대로 끌러가고 심문을 받은 후 서울로 이송되어 2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 8호 감방에서 옥중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어윤희 선생 덕분에 개성에서는 3일과 4일, 그리고 5일까지 학생들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고 독립가를 노래하고 나팔을 불면서 시위하는 등 한때 600명 이상의 군중이 모이기도 했다. 개성의 자존심을 민족지도자 어윤희 선생이 지켜준 순간이었다.
이후 선생은 개성지역의 민족지도자가 되어 근우회, 신간회, 아동복지활동 등을 하다가 해방 후에 월남을 하여 서울 마포에 유린보육원 재건하여 복지활동을 이어갔다.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일항쟁기, 남성들에 비해 그다지 드러나지 않던 여성의 독립운동, 그러나 이러한 여성이 없으면 일어나지 못했을 개성의 독립운동을 살펴보면서, 이 땅의 여성들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아왔는지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