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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독립운동에 투신한 현계옥 기생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11.11 17:11 수정 2018.11.11 17:11

김 지 욱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기생은 우리의 근대 역사를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집단이지만 언제나 역사의 그림자 속에서만 맴돌았고 한 번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기생 하면 떠오르는 흔한 이미지와는 달리 이들은 결코 거세게 밀려오던 근대화의 홍수 속에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오히려 근대문화로 통칭되는 서구의 신문물을 주체적·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나아가 보수적인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타파하여 개화를 위한 선구적 역할을 했다. 즉 근대의 시기에 기생들은 스스로 자의식을 깨우치는 한편 적극적인 자기표현을 통해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의 실현, 교육사업 참여, 자유연애를 통한 개인가치 실현, 독립운동 참여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각자의 삶에 가치 있는 활동들을 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기생의 신분을 뛰어넘어 당당한 독립투사로 활동한 현계옥(1897∼?) 여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조선미인보감(1918년)에서 현계옥 여사를 평가하기를 “경상도 달성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린 아우 계향, 월향과 우애 있게 지내며, 17 세에 비로소 대구 조합에 들어가 예기가 되었다가 19세에 다시 상경하여 다동조합에 이름을 실었는데 풍류가무는 어깨를 나란히 할 이가 없고, 또한 한문에도 망매치 아니하더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대구기생조합은 1895년 감영제도가 사라지고 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1910년 5월에 새로이 설립된 조직이며, 다동조합은 서울의 처녀기생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또한 현계옥 여사는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서구식 승마’를 즐김으로써 한국 근대 승마사에 중요한 타이틀을 이룩하기도 하였고, 이후 일제의 억압에 맞서 ‘항일무장 독립운동가’로 변신했다는 사실로 세간을 놀라게 하는 분이기도 하다. 기생출신의 현계옥 여사는 당대에도 어찌나 유명했는지 1925년 11월 1일부터 7일 사이에 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대담형식으로 그와 관련된 글이 연재된 것을 보면 사회적 영향력도 대단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 그녀의 용모는 풍만했고, 재주는 민첩했다. 경박하지 않고, 풍류가무도 뛰어났다. 무엇보다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 가곡, 정재무, 승무, 그리고 절묘한 가야금 연주, 소리와 산조도 빼어났다. 특히 춤과 가야금에는 대적할 이가 없다하여 풍류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당대의 명기였다.
하지만 그런 콧대 높은 현계옥 여사가 이후 현정건(1887∼1932)이라는 남성을 만나게 되면서 뜨거운 연애사건을 벌이게 된다. 현정건은 유명한 소설가 현진건의 사촌 형으로 일찍이 일본·중국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유학한 신지식인이었다. 그는 때때로 고향에 돌아왔다가 친구와 어울려서 기생집을 한 번씩 찾곤 했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현계옥 여사의 남편이 되었다. 그녀의 나이 19세 때였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쳐 현정건이 대구를 떠나게 되자, 현계옥 여사도 현정건을 찾아 거처를 경성의 한남권번으로 옮겼다. 한남권번은 당시 서울에서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 기생들이 결성한 기생조직이었다.
하지만 현정건이 얼마 되지 않아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 상해로 들어가자 그녀는 자신의 앞길을 다시 결정하고, 험난한 만주 벌판으로 떠날 결심을 굳혔다. 드디어 21살이 되던 해 봄, 1919년 2월에 현계옥 여사는 몰래 가산을 정리하고 길 떠날 준비를 마친 후 귀를 뚫고 중국옷으로 변장하여 만주로 떠났다.
길림, 그곳에는 1918년에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들어간 김원봉, 김좌진, 홍범도 등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들은 ‘의열단’, ‘광복단’ 등 각종 항일기관을 조직하여 내외의 연락을 도모하고 동지를 모집하여 무기를 구입하는 등 무장투쟁을 하는 중이었다. 애당초 이들은 기생출신이라는 이유로 현계옥 여사를 믿지 못하고 거부감을 가지기도 했으나, 현계옥 여사의 끈질긴 노력과 정성을 차츰 알게 되자, 의열단장 김원봉을 시작으로 점차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결국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의열단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이후 현계옥 여사는 현정건에게서 영어를, 김원봉으로부터는 폭탄제조법과 육혈포 쏘는 방법을 배우며 조직의 비밀활동을 맡았다. 이때 얼른 보기에는 여자라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신을 감행하기도 했다.
한번은 중국 천진에 있는 폭탄을 상해로 운반해야 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었다. 일제 관헌의 감시가 삼엄하던 터라 현계옥 여사는 양복을 입고 폭탄을 지닌 채 단신으로 배를 타게 되었는데, 이를 의심한 관헌의 취조가 더욱 심해지자 그때마다 천연덕스럽게 처음 만난 서양사람 옆으로 가서 친한 척 말을 걸면서 남 보기에 마치 부부가 여행하는 것처럼 꾸몄고 결국 무사히 운반에 성공할 수 있었다.
상해에서도 현정건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차 1928년 현계옥 여사가 30세 되던 해, 현정건이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지방법원으로 끌려가 징역 3년형을 선고받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그가 출옥 후 옥고의 후유증으로 끝내 병사하자, 충격을 받은 현계옥 여사는 더 이상 정들일 곳 없어 그만 내몽고를 거쳐 시베리아로 망명해 버렸다. 이제 정칠성 기생에 이어 당대의 대표적인 또 한 명의 ‘사상기생’이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세상, 즉 혁명가의 꿈을 꿨던 당대의 행동파이자 진정한 자유를 갈망했던 현계옥 여사는 더 이상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오호, 통재라. 선구자는 항상 외로운 길을 걷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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