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작가 드미트리 글루코프스키의 소설 ‘메트로 2033’은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상을 피해 지하철로 들어간 사람들이 각 역마다 국가를 이루어 살아가는 이야기다. 지하철역이 도시가 된다는 기발한 상상력 하나로 글루코프스키는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가 됐다.
문명이 멸망한 이후의 종말론적 세계를 그린, 이른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장르를 대표하는 이 작품은 소설뿐 아니라 같은 이름의 게임으로도 제작돼 큰 성공을 거뒀다.
소설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게임은 그 상상을 일종의 가상현실로 만들어 시너지 효과를 냈다. ‘메트로 유니버스’라는 독특한 세계관까지 탄생시키며 다양한 파생 작품들을 쏟아냈다. 게임으로서의 문학, 나아가 문학으로서의 게임의 가능성은 이처럼 무궁무진하다.
문학과 게임의 만남은 현대 공상과학 소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문학이 게임과 불가분의 관계임은 고대 고전 작품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트로이 전쟁을 다룬 ‘일리아드’는 올림포스 신들의 게임에 의해 좌우된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의 10년간에 걸친 귀향 모험담을 그린 ‘오디세이’는 그 자체로 스릴 넘치는 게임이다. 황금 양모를 찾아 원정을 떠나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제이슨과 아르고 전사들의 이야기 또한 게임의 속성을 지닌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게임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게임은 한갓 ‘놀이하는 인간’의 욕망을 소비하기 위한 일회용 상품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다. 문학의 게임적 속성이니 게임의 문학적 상상력이니 하는 담론을 앞세울 것도 없다. 분명한 것은 게임이 오랜 역사를 지닌 명실상부한 문화인 이상 소홀히 다루거나 함부로 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중독’이다. 게임중독은 현실을 떠나 판타지 속에서 게임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병적 상태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김민영의 장편 스릴러 ‘팔란티어’는 온라인 게임중독 용의자의 살인사건을 통해 가상과 현실의 이중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보여준다. 이것은 물론 소설이지만 게임중독은 그만큼 치명적이다.
요즘 게임 논란이 뜨겁다.
게임중독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임중독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게임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2013년에는 청소년의 게임 이용 시간을 제한하는 ‘셧다운제’를 도입했다. 국회의 문턱을 넘지는 못했지만 게임을 마약, 알코올, 도박과 같은 ‘중독유발물질’로 분류해 관리해야 한다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게임 폐해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게임중독이 질병으로 인정되면 정확한 통계를 산출할 수 있고 효율적인 치료와 예방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질병 등재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보다 면밀한 학술적 검증과 과학적 데이터를 통해 게임장애에 대한 합리적인 기준부터 마련해야 한다.
게임은 더 이상 청소년 등 특정 집단에서나 통용되는 하위문화가 아니다. 갈수록 영토를 넓히고 가치를 더해가며 ‘지배문화’가 됐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게임은 문화콘텐츠산업의 총아로 한층 주목받고 있다. ‘게임질병’ 논란으로 말미암아 게임 고유의 문화적 가치가 훼손돼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