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올림픽이 모든 국민들의 관심 속에 화려하게 막을 내리고 지난 9일 뒤이어 패럴림픽이 시작되었지만 올림픽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4년 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출전한 선수들, 메달을 따든 따지 않든 그 노력과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이번 평창 패럴림픽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나의 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셨다. 60, 70년대 우리나라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뿐이었기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니던 어린 나는 이유도 모르고 그런 차별과 멸시를 받았었다.
1988년 처음 열린 패럴림픽을 계기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차별과 멸시는 ‘장애인우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동정과 연민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20년이 더 흐른 지금 급변한 사회 환경과 함께 장애인에 대한 정책도 많이 변했다. 정부는 법과 제도 뿐 아니라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의무적으로 시행하기까지 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사회 환경을 바꾸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장애인 기관에 후원하고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넘쳐나지만 여전히 장애인 기관을 설립하는 것은 주민결사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좌절되고 마는 상황이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인격적이 아니라 여전히 동정이나 연민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2011년 대구에서 열린 세계 육상선수권대회에 의족 스프린터로 알려진 피스토리우스가 출전했었다. 그가 사용하는 의족은 일반 올림픽에서도 패럴림픽에서도 논란의 대상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실력은 그 의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훈련을 했느냐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형제들이 신발을 신을 때 나는 의족을 붙이는 것뿐이라며 다른 비장애형제와 자신의 차이점을 이야기했다.
그렇다. 장애와 비장애의 차이는 모든 일에 있어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가 손을 사용하는 게 다르듯이 장애와 비장애는 같은 일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한다는 것뿐이다. 우리 모든 사람이 선호도가 다르고 똑같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다르듯 장애와 비장애도 그냥 다른 것뿐이다.
장애라는 것이 살아가는 모습이 다를 뿐이라고 이해하고 마음으로 공감하는 것은 교육으로만은 안 된다. 우리 삶에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저절로 공감하게 해야 한다. 나는 교육은 듣는 것이고 복지는 주는 것이며 문화와 스포츠는 느끼고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으로 장애를 이해하고 복지의 일환으로 그들에게 봉사하고 후원을 하는 것이지 장애인을 인격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반면 문화와 스포츠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져 만나고 함께 즐기면서 서로를 바라보며 장애와 비장애는 단지 모습이 다를 뿐이라고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마음으로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장애인 예술인을 육성하고 장애인 스포츠 메달리스트를 육성하는 것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모든 장애인들이 문화와 스포츠를 어디서나 즐길 수 있도록 저변 확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예술관, 장애인체육관이 아닌 모든 문화시설과 체육시설에서 비장애인들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옛말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장애인 인식개선교육 백번 참가하는 것보다 장애인과 실제로 함께 문화나 스포츠를 잠깐이라도 즐기는 시간을 갖는 것이 더 효과가 클 것이다.
이번 평창패럴림픽이 모든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함께 어디서나 문화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저변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