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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사제기행(師弟紀行)

안진우 기자 입력 2018.03.11 17:32 수정 2018.03.11 17:32

내가 제자 조성일 법학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76년으로, 산북중학교(문경시 산북면 소재)교사로 부임해서, 2학년 1반 학급담임교사를 했을 때부터다. 조성일군은 성격이 남자답고 체격도 당당하고,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다.
산북면은 전형적인 두메산골로 산이 높고 들이 좁은 편이라,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인심은 순후한 편이었다. 학생들도 교사(선생님)를 잘 따르고, 정이 있었다.
내가 담임하던 학급의 김춘기군은 나와 같은 경주 김가로, 항열로 따지면 내게 손자뻘이었다. 그 해 가을 김춘기는 송이버섯 네 개를 내손에 쥐어주었다.
일요일 날 마을 뒷산에서 딴 것이라 했다.
양이 많고 적은 게 무슨 대수랴. 송이버섯에서 풍기는 향기는 춘기 마음의 풋풋한 내음이었다. 한참 동안 춘기를 잊고 살았는데, 춘기의 친한 친구를 만나 춘기의 근황을 물었더니 몇 해 전에 안타깝게도 춘기가 병사(病死)했단다. 그뿐 아니라 춘기의 누나이자, 산북중학교 같은 학년인 명순이도 춘기와 같은 무렵에 세상을 떠났단다. 단명(短命)한 두 남매제자의 명복을 마음속으로 빈다.
조성일 학사는 중2때 춘기와 같은 2학년 1반으로, 올해 57세로 건강하고, 충실한 직장인으로 나날을 밝고 보람차게 살아가니, 고맙기 그지없다. 내·남 없이 늘그막은 심심하고 낙(樂)이 없는 게 공통인수다.
내 경우엔 시와 칼럼을 즐겨짓고, 역사를 계속 연구하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여 딴 늙은이보다는 덜 심심하다고 할 수 있다. 금상첨화로 지난 젊은 교사시절의 제자가 한달에 두어 차례 나를 초대하여 문경시와 이웃인 상주시의 명소·절경을 구경시켜주고, 이야기를 곁들여 제자 조성일 법학사와 만나는 날은 하루해가 너무 짧기만 하다.
제자 조성일 법학사는 바쁜 직장인이지만, 비번일엔 여가시간을 적절히 활용하여, 한문실기능력 검정시험에 1급과 특급을 거머쥐었고, 요사이 인기절정인 공인중개사시험도 응시 첫해에 단발명중(單發命中)하여, 퇴직후도 심심치 않도록 만반의 대비를 했다.
오늘(2018.3.7.)도 조성일 법학사는 비번일이 되어, 나를 초대하여 문경읍 갈평1리, 지난날 이데올로기의 희생자 위령비를 견학하게 됐다. 조성일 법학사도 ‘위령비’ 문안을 읽고 감동했다.
지난날의 잘잘못을 새삼 따지지 않고, 망자(亡子)를 위로하고 살아있는 사람도 가슴에 따뜻함을 더해준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위령비’ 글을 닦은 김시종(金市宗)시인은 어디 사는 사람이냐고 물어, ‘문경토박이’라고 하자 문경에도 이렇게 뛰어난 사람이 사느냐고 놀라워하더라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내게 전해 주었다.
갈평(갈벌) 1리 역사현장의 위령비속으로 들어가보자.
위 령 비

삼가 영령께 아뢰나이다.
늙어 병들어 세상을 떠나도, 오히려 한이 깊거늘.
젊은 날 누명을 쓰고 비명에 가셨으니.
망자와 유족의 원이 오죽했으리오.
늦었지만 다행히 진실이 밝혀져 유명을 달리한
임들의 결백함이 드러났으니, 임들은 깊은 원한을
푸시고, 이제 눈물을 거두시어, 평안히 눈 감으소서.
다시는 이 땅에 지난날의 어두운 그림자가 없기를
다짐하며, 권봉석 어르신을 비롯한 21위의 영령께서
정토에서 명복을 오롯이 누리시기를
손 모아 비노이다.

(2013년)

▲ 김 시 종 시인 /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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