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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산거' 산이 깊음을 이제 알았네

김경태 기자 입력 2024.10.08 11:53 수정 2024.10.09 08:26

미디어발행인협 회장‧언론학박사 이동한

↑↑ 미디어발행인협 회장‧언론학박사 이동한

"봄은 가도 꽃은 외려 남아 있고/ 날이 개도 골짝은 그늘에 가렸네/ 두견새 대낮에도 우는 것을 보니/ 내 사는 산이 깊음을 비로소 알겠네(春去花猶在/ 天晴谷自陰/ 杜鵑啼白晝/ 始覺卜居深)" 고려 중기 문신이며 학자, 시인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지은 산거(山居)제명의 시다. 산유(山幽)라고도 한 이 시는. 깊은 산속에 살고 있는 선비의 담담한 서정을 그린 오언절구의 한시다.

봄이 갔건만 너무 깊은 산속이라 꽃이 시들지 않고 하늘은 화창한데 주변은 어둑어둑하다. 그래서 두견새는 밤이 온 줄 알고 울고 있으니 시인이 사는 곳이 깊은 산속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뜻이다. 이인로는 고려 초기 명문 거족인 인천 이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절에서 성장했으며 사회로 나와 문인과 함께 활동했다.어릴 때부터 한학과 작문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당 시대 죽림고회의 맹주로 중국에 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홍만종의 소화시평에는 이 시가 당나라의 시와 방불하다고 평가 했다. 정중부의 무신난으로 삭발을 하고 중이 되기도 했으며 환속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기도 했으나 어지러운 현실과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울분을 품기도 하고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가기도 했다 한다. 산속에 거한다는 산거라는 제목의 이 시는 속세를 떠나 은둔하며 한 세상을 살았던 많은 선비들이 공감했던 명시다. 

시 구절 속에는 더 깊은 뜻이 들어 있다.

단순히 관찰하면 피어 있는 꽃, 그늘진 계곡, 낮에 우는 두견 소리를 듣고 비로소 깊은 산속에 있다는 자신을 깨달은 시인의 은거 생활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무신이 판을 치는 난세에 현실 참여가 좌절되고 도망치듯 피난을 와서 세상을 잊고 자연에 묻혀 살고 있는 선비의 심경은 예측하기 어렵다. 봄이 갔는데도 늦게 피는 꽃은 출세의 때를 놓친 선비 자신이며 하늘이 밝아도 거늘진 계곡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선비의 처지로 볼 수도 있다. 밤이 오지도 않은 대낮에 두견이 우는 것도 세상을 떠나 외롭게 살고 있는 선비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이 또한 한없이 고독한 은둔자의 모습이다. 속세를 떠나 자연속에 사는 선비의 삶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 볼 수도 있다.

산속에 사는 사람이 시인이 되어 자신의 심경을 시로 쓰고 신선의 경지에서 참선을 한다. 문신에게 무시 당하던 무신이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농단하는 시절에 정의와 진실이 무도하게 짓밟히고 권력자의 눈에 거슬리면 무참히 제거되는 살육장을 떠나 깊은 산속에 숨어 사는 선비들이 고려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조시대에도 일제시대에도 광복이 되고 대한민국에도 형태는 다를 지 모르지만 현실도피 은둔산거의 지식인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 자연인이 되는 사람 중에는 몸은 세상에 있어도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산속에 들어가 있어도 세상을 떠나지 못한 사람도 있다.

혼자 있어도 두렵지 않고 세상을 떠나 살아도 고민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獨立不懼 遁世無悶)이 중요하다. 이인로 시인의 '산거' 시를 읽으며 나는 세상을 떠나 있는지 세상 속에 있는지 돌아 보자. 세상에 있어도 산속 깊이 거하듯 세상과 단절하고 은둔하고 있다면 두려움과 고민도 없고 외로움도 없이 지내지는 못하더라도 분노와 욕심에 잡혀 사는 세상에서 해방되어 자유로 살아 갈 수 있으면 된다. 속세를 떠나 있으면 누구의 감독을 받을 필요도 없고 누구를 감독할 필요가 없다. 우선 내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자연과 잘 지내면 된다.

밤에는 자고 낮에는 먹고 일하고 놀고 하는 일상이 자연과 관계를 주고받는 일이다. 몸은 수명을 다하면 언젠가 자연으로 흩어지고 정신의 실체라는 영혼은 내세로 간다하니 잘 갈고 닦아서 빛나는 모습으로 날아가야 한다. 은둔의 산거 생활을 통해 속세의 오영을 씻고 생의 황혼을 안락하게 보내며 다음 생을 멋있게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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