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나가 보니 국악이 굉장히 경쟁력 있는 음악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거문고 명인 허윤정(48)이 이끄는 즉흥음악 앙상블 '블랙스트링'이 국악그룹 최초로 독일의 굵직한 재즈 음반사 ACT를 통해 앨범을 낸다. 세계적으로 마니아를 보유하고 있는 ACT는 역시 독일의 재즈 레이블인 ECM과 함께 유럽의 양대 재즈 음반사로 통한다. 세계적인 한류스타 재즈보컬 나윤선을 비롯해 스웨덴의 거장 트롬본 연주자 닐스 란드그렌 등의 앨범을 내놓고 있다. 올해 5월 독일 브레멘에서 개최된 재즈 마켓인 '재즈어헤드(Jazzahead!)'에서 데모 음반을 들어본 ACT의 지기 로흐 회장이 관심을 표하면서 성사됐다. 블랙스트링은 이 레이블에서 정규 음반 다섯 장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해외 진출을 모색하던 중 멤버들끼리 ACT에서 내면 정말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했어요. 정말 꿈이 이뤄진 것죠. 게다가 한장도 아니고, 다섯 장이나.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아마 저희를 통해 재즈의 경계를 넓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짐작해봐요."총 7곡이 실린 데뷔앨범 '마스크 댄스'는 10월 중순께 발매 예정이다. 앨범에 실린 곡의 타이틀이기도 한 제목은 처용무(處容舞)에서 따왔다. 궁중이나 관아의 의례에서 처용(處容)의 가면을 쓰고 잡귀를 쫓아내는 춤이다. "앨범에 실린 또 다른 곡으로 국악 장단인 칠채를 바탕으로 한 '세븐 비츠(Seven Beats)'와 비슷한 때인 2012년에 만든 곡이에요. 제가 처용이라는 설화를 좋아하는데 춤, 음악, 연기 등이 녹아 있는 종합 예술이죠. 전통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가 있고, 현실 세계랑 동떨어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도 있고. 저희가 추구하는 음악 색깔 자체가 그래요."2007년 미국 록펠러재단의 레지던스 아티스트로 선정돼 뉴욕에서 재즈 뮤지션을 만나는 등 꾸준히 재즈와 협업한 허윤정은 국악과 재즈가 기반이 다르지만 통하는 면이 많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다. "재즈 뮤지션과는 음악적인 정서가 비슷해요. 굉장히 편하죠. 뉴욕에서 재즈 뮤지션과 즉흥 연주를 하기도 했는데 마치 한국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이질감을 전혀 못 느꼈어요. 국악이건 재즈건 국내외에서 좋은 뮤지션들을 만나는 건 제 성장에 도움이 되죠. 기본적으로 음악 등 예술은 소통이고 상상이라는 걸 배워가고 있어요. 덕분에 저도 유연해지죠."허윤정은 남성적인 국악기인 거문고에 유연한 여성의 숨결을 불어넣은 주인공으로 통한다. 모성애를 품는 그녀의 거문고 소리는 묵묵히 모든 것을 포옹한다. 그런데 거문고는 개량이 힘든 고집스런 악기로 알려졌다. 그래서 전통을 지켜가고 있는 몇 안 되는 악기 중 하나다. "그런 전통을 훼손하지 않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나가는 것이 거문고의 중요한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블랙스트링이라는 그룹명은 거문고를 가리킨다. '검다'는 거문고라는 명칭의 어원 중 하나로 '검다'가 꼽힌다. 하지만 허윤정을 중심으로 오정수(기타), 이아람(대금·양금), 황민왕(아쟁·장구)으로 구성된 블랙스트링은 다채로운 음색을 내는 팀으로 통한다. "연주자들이 굉장히 유연해요. 뭐든지 받아들이는 자세와 호기심이 크죠. 리드하고 책임지는 최종 결정은 제게 있지만 그 결정을 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은 멤버들이 다 만들어줍니다. 마치 제 생각이듯 따라주죠."10월 19~23일 스페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월드뮤직 엑스포 '워멕스(WOMEX)'의 공식 쇼케이스 아티스트로 선정된 블랙스트링은 내년에 재즈의 본고장으로 통하는 미국 무대를 노크한다. 해외에서 활동할 때 당위성과 명분이 앞서기 쉽다. 특히 국악을 갖고 해외로 나갈 때 애국심이 따르는 건 당연하다. 허윤정은 하지만 "그런 부담에 눌려 음악적인 자유로움이 제한될 수 있거든요. '블랙스트링이 결국 해냈다' '허윤정이 돌파구가 됐다'는 말은 힘이 되고 좋지만 그런 성과보다는 마음껏 음악을 펼쳐보이는 자유로운 음악가가 되고 싶다"고 바랐다. "후배들이 해외에서 활동할 때 저희들의 활동에 용기를 내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면 더 행복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