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왕조가 건립된 후에, 신라 1000년의 역사를 그만둬도, 조선 왕조같이 500년이나 계속된 사례는 전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다. 중국의 천하도 500년은 없다. 이렇게 장구(長久)한 왕실이 있다는 뜻은 임금을 제외해도 종친까지 합하면, 그 수는 역사학도의 몫이다. 이들이 후대까지 남긴 모든 것은 문화·예술품이다.
이들 중엔 태실(胎室)이 있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胎)를 봉안하는 곳을 지칭하는 용어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다. 태실은 일반적으로 태옹(胎甕)이라는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다. 왕세자나 왕세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가봉될 것을 감안하여, 석실을 만들어 보관했다.
왕자나 공주·옹주가 태어나면, 태를 봉안할 장소를 관상감(觀象監)에서 물색했다. 봉송 및 개기(開基)·봉토(封土) 등의 날을 가려 정했다. 선공감(繕工監)에서는 태를 봉송할 도로를 수치하여, 역사에 지장이 없도록 대비한다. 봉송일이 되면 봉송 관원을 임명한다. 당상관으로 안태사(安胎使)를 정해, 안태 봉송의 책임을 맡긴다. 배태관(陪胎官)을 차정해, 태를 봉송하는 도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다. 전향관(傳香官)과 주시관(奏時官)을 차정, 안태사와 배태관의 업무를 보좌한다. 그와는 별도로 당하관으로 감동관(監董官)을 뽑아, 일체의 공사를 감독한다.
영천 청통면 치일리에 소재하는 ‘영천 인종대왕 태실’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태실봉안 의례에 따라, 1521년(중종 16)에 처음 설치됐다. 인종이 즉위하면서, 1546년(명종 1)에 가봉(加封)공사가 완료됐다. 이후 1680년(숙종 6)에 개수를 거쳐, 1711년(숙종 37)에 태실비의 재건이 이뤄졌다.
1928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태 항아리 등이 서삼릉으로 이안됐다. 석물은 폐기돼 방치됐다가, 1999년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조선총독부는 우리의 문화재를 보는 대로, 또는 닥치는 대로 훼손하거나, 자기 나라로 가져갔다. 참으로 악랄(惡辣)한 일제다. 이후 2007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됐다.
현재는 태실 1기, 가봉비 1기 및 기타 석물로 이뤄져 있다. 가봉비의 앞면에는 ‘仁宗大王胎室’, 후면에는 ‘嘉靖二十五年五月日建’(1546년)이라고 새겨졌다. 태실의 주인과 태실비의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다.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설치 과정과 내력을 알 수 있는 관련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게 남았다. 전체적 조영 기법과 구조 등이 조선왕실 태실 의궤의 내용과 부합한다. 세부 장식이나 조각기법 등이 우수해, 역사적·학술적·예술적·기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또 처음 설치된 이후 원래 위치를 유지했다.
현존하는 조선왕실의 태실 가운데 규모가 크다. 문화유산으로써의 보편적 가치와 완전성과 진정성도 구비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영천 인종대왕 태실’에 대해선,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의견을 수렴한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최종 지정이 확정된다. 경북도는 조선왕조 태실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지난 4월 26일 경기문화재단(수원) 회의실에서 경북·경기·충남 등 3개 광역자치단체의 관계자가 모여 회의를 가진 바 있다. 이날 회의에서 앞으로 지속적 모임을 갖기로 했다. 지자체간 네트워크 구축 및 관련 협의체 구성, 등재 범위 획정 등의 추진방안을 차근차근 모색해 나간다. 문화재청과의 협력관계도 강화해 나간다.
김상철 경북 문화관광체육국장은 2017년 도내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선왕조 태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도가 앞장선다. 경북도는 도 차원에서, 태실서부터, 각 지역이 산재한 문화재를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 전수조사에 따라, 보물로 지정되기 전에라도, 보존에 행정력을 다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