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보기관 NIC의 7번째 글로벌 트렌드 보고서가 최근 출간되었다. 2040년을 전망하면서, 더욱 치열하게 경쟁하는 세계(a more contested world)라는 부제를 달았다.
NIC는 1997년부터 글로벌 트렌드를 전망, 공유하면서 축적된 노하우가 있어 이들의 의견은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물론 미국 중심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어서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펴내는 세계 전망을 함께 비교해서 읽는 것이 좋다.
NIC 전망보고서는 기술, 인구, 환경, 경제라는 4개의 눈으로 세계적 변화를 전망한다. 이 4개의 동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글로벌 트렌드를 만들어내고, 이 변화에 개인, 정부, 국제사회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예측한 것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이다.
2040년을 가늠해볼 수 있는 키워드로 기술과 사회에서 초분열, 인구에서는 중산층의 정체, 환경에서는 극심한 기후, 그리고 경제에서는 국내총생산(GDP) 규모로 선두자리의 바뀜 등이 주목된다.
이 동인들의 영향으로 빚어진 20년 뒤의 미래는 지구적 난제는 해결되지 않고, 기존의 전통적 강자들이 쇠퇴하기 시작하며,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성을 뒷받침했던 중산층의 감소 등으로 세계는 더욱 불안하게 생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같은 글로벌 트렌드에 변화의 주체들은 어떻게 반응 또는 대응할까. 보고서는 개인, 정부, 국제사회 등으로 나눠, 이들의 사회적 동학을 이해하려고 한다.
·개인적 차원: 빠른 변화, 원치 않는 변화의 확산에 대해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욱 비관적 태도를 갖게 될 것이며, 이런 비관적 태도는 경제적, 기술적 불평등의 가속화로 심화된다. 또한 사람들은 각종 정보를 습득하고 해석하며,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선호를 표출할 것이다. 선호를 실현하는 능력도 강해져 목표가 다른 그룹끼리 치열하게 경쟁하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갈등을 겪는다.
게다가 사람들은 잘못된 정보, 역정보의 혼란 속에서 정보의 맞고 틀림보다는 자신이 듣고 싶은 정보에 경도될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신념을 기반으로 더욱 편향된 행동을 하게 되어 우리가 마주할 사회적 갈등은 해결하기 힘들어진다. 종교는 이 편향된 행동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정부 차원: 정부는 이전보다 훨씬 다각적인 시민사회의 압력에 직면한다.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 환경파괴에 대응, 다양한 갈등의 해결 등에서 정부의 역할이 증가한다. 그러나 정부는 시민들의 점증하는 요구에 적절한 정책을 내놓지 못해 시민사회의 불만은 누적된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의 효율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이념의 양극화, 극단적 대중인기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국의 경우, 향후 중국 공산당이 경제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고 공공보건을 강화하며 사회안전망을 구축할지 아니면 지금은 잠시 침묵하고 있지만 중국의 대규모 중산층이 느린 경제성장이나 불안한 사회안전을 이유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면서 공산당을 압박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각국의 지방정부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거주민의 수요를 잘 파악하며 그에 맞는 대응을 할 수 있어서다. 더욱이 기후변화의 대응에서도 지방정부는 시민사회, 기업들과 협업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활용해 효과적인 실행안을 찾을 수 있다.
·국제사회의 측면: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강대국의 시대가 주춤하고 다양화된 힘들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과 중국은 여러 면에서 더욱 경쟁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의 규범이 변화될 것이고, 다양화될 것이다. 국가들간 갈등은 빈번해지고 이를 규제하는 강력한 규범과 강대국이 존재하지 않아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각 국가들은 어느 국가가 높은 기술력을 갖췄는지, 협력의 네트워크가 있는지, 고도의 정보력이 있는지에 따라 이합집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고서는 앞서 설명한 4개의 동인과 새로운 글로벌 트렌드, 그리고 변화 주체들의 대응 방식을 조합해 향후 전개될 미래를 5개의 시나리오로 제시한다.
·민주주의 르네상스: 미국과 그 동맹국 중심의 열린 민주주의로 세계가 다시 경제적 성장, 삶의 질 향상을 일궈낸다. 열린 민주주의가 기술과 사회혁신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중국과 러시아는 기술개발, 경제성장에서 흔들린다. 이에 따라 이들 국가의 사회적 통제가 다소 완화될 수 있다.
·표류하는 세계: 성장의 정체, 흔들리는 국제 규범, 사회적 문제의 확산으로 혼란한 시대를 맞이한다. 중국의 영향력 확대는 인접 국가들의 군비 투자 확대로 이어지고, 지역적 불안이 심화된다. 일부 개발도상국은 경제와 환경을 살리기 위해 중국에게 투자를 요청한다. 규범의 혼란을 틈타 테러는 증가하고 기후변화 같은 지구적 난제 해결은 답보상태다.
·경쟁적 공존: 미국과 중국이 경제적 성장과 자유무역을 위해 협력하는 미래다. 서로의 의존성 확대로 군사적 위험은 낮아진다. 그러나 공존의 표면 아래에서 양국은 다중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정보수집력, 기업의 첩보활동, 사이버 공격을 감행한다. 세계가 현재의 이익만을 중시하다 보니 기후변화를 위한 중장기적 대응은 약화된다.
·분열의 이기주의: 미국, 중국, 유럽, 러시아 등 강대국의 분열로 각국은 치열한 생존경쟁에 몰린다. 기업의 재정적 손실, 시장 기능의 쇠퇴, 글로벌 밸류 체인의 붕괴가 벌어진다. 자원과 기술력이 강한 선진국만 생존에 유리한 상황이며, 일부 국가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혼합형 정치제도를 추구할 가능도 있다.
·비극과 동원: 극심한 기후, 식량난, 경제성장의 정체, 사회적 불안정의 증가에 세계는 밑으로부터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시도한다. 유럽과 중국의 주도로 세계 수많은 청년조직들과 협력해 전세계적인 문제로 지목된 기후변화, 환경파괴, 자원고갈의 대응에 나선다. 이를 통해 세계는 신에너지 시대로 진입한다.
5가지 미래 중 세계는 어떤 미래로 나아갈까. 시나리오별 제목의 뉘앙스로 판단해보면 미국은 첫 번째 시나리오 ‘민주주의 르네상스’를 선호할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지 않을 경우 세계는 표류, 경쟁, 분열의 상황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하는 시나리오에서는 미국보다 유럽과 중국의 역할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세계질서를 유지했던 미국적 방식에 대한 비판 때문이다.
향후 20년을 전망할 때, 가장 불확실한 요소는 세계가 경제적 가치(지속적 성장, 충분한 물적 자원)와 환경적 가치(환경보존, 에너지 전환)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할 것이란 점이다.
NIC 보고서는 미국이 지향하는 기술적 낙관론과 열린 민주주의로 경제성장과 환경보존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전망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에서 보여줬던 반세계적, 반생태적 정책을 보면 장밋빛 전망에 불과하다.
‘비극과 동원’이라는 시나리오에서는 세계가 거의 붕괴직전에 몰렸을 때야 정신을 차리고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하는 것으로 전망하는데, 나도 이 견해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관을 보지 않으면 정신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성장과 분배, 경쟁과 협력, 경제와 환경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을 화해시키고 상호보완할 새로운 메커니즘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것일까. 21세기형 새로운 보이지 않는 손, 윤리적 경제성장, 탈물질주의 성장론자 등은 이론이나 개념에 불과한 것일까.
NIC 보고서에서 언급되는 한국의 미래는 주로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가구 당 지고 있는 빚 규모를 보면 한국은 2000년과 비교해 2018년 가구당 소득은 소폭 증가한데 비해 가구당 빚(GDP 대비)은 대폭 증가했다(50% -> 90%). 집값 상승, 건강과 교육 관련 지출 상승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대부분 국민은 빚만 늘어가고 있는 현실을 드러낸다.
게다가 한국은 1990년과 비교해 2018년 현재, 소득불평등도 증가하고 있다. 세계 불평등 평균에는 미치지 않지만, 불평등도가 증가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노력이 자본을 못 따라가는 현실은 더 확대될 것으로 예측된다. 청년들은 이미 영혼까지 갈아 넣어 힘겹게 생존하고 있어서 더 노력할 여력은 없어 보인다. NIC의 예측대로 더욱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새로운 사회적 비전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