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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국 시집대왕 조병화 시인·화백 교수님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21.05.19 18:54 수정 2021.05.19 18:54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지금은 시인(문인)이 겁나게 많아, 문인 총수가 1개 군단 병력(5만 명)을 넘는다고 추산하는 이들이 많다. 한국시인 중(작고시인‧생존시인 포함) 개인 창작시집을 가장 많이 펴낸 시인은 작고한 중진시인 조병화 시인 교수님을 대적(맞설)할 이가 없다. 조병화 시백은 생전에 60권의 알찬 시집을 내어, 문단에서 전무후무한 시집왕(詩集王)으로 등극하셨다.
조병화 시인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다복(多福)한 삶을 누리셨다. 머리가 천재다. 일제시대 때 가장 입학하기 힘든 경성사범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전신)에 수석 합격하여, 5년 뒤에는 수석졸업의 신화(神話)를 기록했다. 일제 때 경성사범학교 입학시험에 합격만 해도 당시 조선인들은 천재라고 격찬했다. 조병화는 일본 동경에 고등사범학교(현행 사범대학)에 자동입학의 특전이 부여됐다. 동경고등사범학교는 당시 사범학교 수석졸업자들에게 입학을 허용했다. 해방 다음해(1946년)에 고등사범학교 수학물리과를 거뜬하게 졸업하고 귀국하여 첫 발령지로 인천제물포 중학교 교사가 되고, 곧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발탁됐다.
당시 서울고등학교 교장은 거물(!)인 김원규 교장이었다. 김원규 교장은 수학교사인 조병화 시인이 시인인 점을 크게 인정하여 수학교사에서 국어교사로 일대전환을 단행했다. 얼마 안 있어 경희대 국문학과 교수가 되고 문리대 학장이 되었는데 인천의 인하대학교에서 시인 조병화 교수를 인하대학교 부총장으로 특별 초빙했다.
시인 조병화 교수는 소통의 시인이었다. 제자들(국문과 학생)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겼고, 졸업 후에도 시인 조병화 교수께 호감을 지니고 살았다. 조병화 시인 교수는 시집 60권을 내셨지만 단순하게 많은 분량(60권)만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60권의 시집 내용이 언어의 보석을 가득 품고 있어, 시집을 읽으면 가슴이 따뜻하고 시의 언어도 일상생활용어를 활용 구사하여 소통이 잘 되어 시집을 낼 때마다 베스트셀러가 되곤 했다.
일류시인이자 일류화가인 조병화 시인 교수는 팔방미인이요, 다재다능한 천재다. 생활(생활비)은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개업의인 영부인께서 척척 조달하여 조병화 시인은 교수월급과 시원고료를 시집을 내고 맥주값으로 전액 투자할 수 있었다.
당시 다른 문인들은 일정한 직장도 없고 원고료 수입도 거의 없어 술꾼들인 시인이 소주 한 병도 탈모(脫帽) 할 수 없는 쪼잔한 처지였다. 청교도 시인 김수영은 조병화 시인을 만나면 얼근히 취한 목소리로 ‘병화야, 너 맥주 마셨지? 나는 소주 마셨다’ 시비를 걸곤 했다. 조병화 시인은 취미로 담뱃대(빨주리)도 수집하여 멋을 한껏 부렸는데 건강진단결과 금연령이 내려, 동작이 빠른 제자들이 조시인의 빨주리를 노획해갔다고 한다.
조병화 시인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으로 느긋한 인품을 보여 주셨고, 예술원 부원장으로 선출되어 실력과 인품을 검증받았다. 필자가 조병화 시인 교수님을 잊지 못하는 것은 1985년 7월 28일 당시 서산군 몽산포에서 열린 해변시인학교(심상 주최)에 갔다가, 이른 아침 몽산포해수욕장 솔밭에서 중진원로 시인이신 미당 서정주 시인(교수)‧정한모시인(문화부장관)‧조병화 시인‧저 김시종이 해돋는 아침에 솔밭에서 가까이 앉아 환담하고 특히 그 아침 시인 조병화 화백님이 카메라로 사진 찍을 시간만큼도 안 걸려, 나의 캐리커처를 멋지게 그려 주셨다. 2분도 안 걸린 것 같다. 제 얼굴의 특징을 100% 살리고, 사진보다 더 정밀하게 그리셨다. 진짜 천재는 못 말린다.
시집 60권을 내어 불통의 사회에 화끈하게 소통을 이룩하신 조병화(1921~2003) 시인 화백님의 시 ‘어느 인간관계’를 감상해 보자구요.

(시) 어느 인간관계 / 조병화

설악산 깊은 이곳에서도
수화길 들고
여보세요 하면
뉴욕‧런던‧파리도 나오는데
지척에 있으면서
너하곤 이렇게도
불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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