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청 신도시는 대한민국 역사문화의 대동맥이다. 사방 삼십 리 안에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길목마다 마을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테마가 살아 숨쉬고 있다. 도청 정문과 검무산 넘어 독립운동의 성지 가일마을과 오미마을이 이어지고, 남동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중심 하회마을과 소산마을이 이어지며, 병산서원과 청원루가 양란을 극복한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는 양란의 두 정승이 한 곳으로 들어가 은거한 서미 마을로 이어진다. 임진왜란 후에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징비록을 쓰던 류성룡 선생이 찾아들고, 병자호란 후에 청원루에 머물던 김상헌 선생이 다시 찾아든 서미 마을은 조선의 수양산이라고도 한다. 은나라가 망하자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가 죽은 고사처럼, 조선의 두 선비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서미에 은거하였다는 것이다.
3,000년 전의 중국 고대사가 400년 전에 조선에서 되살아난 이 기묘한 역사문화야말로 테마관광 스토리텔링의 백미가 아니겠는가? 경북도청신도시 동쪽 30리 길에 두 선비가 바라보던 중대바위가 서미마을 산중턱에 하늘과 맞닿아 있다. 그 중대바위 아래에 류성룡 선생은 ‘농환재’라는 초가집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말년을 보냈으며, 40년 후에는 청나라에 항거하던 김상헌 선생이 ‘목석거(木石居)’라는 초가집을 짓고, 나라를 못 지킨 죄인이라며 후학을 양성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렇게 ‘농환재’에서 임진왜란에 지친심신을 달래던 서애 류성룡 선생은 3년여 후에 운명하셨으며, 굴욕적인 항복에 항거한 청음 김상헌 선생은 ‘목석거(木石居)’에서 또다시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선양(瀋陽)으로 압송돼 6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 한양을 지나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는 우국충절의 고별시로 드높은 조선선비의 기개(氣槪)를 만천하에 떨쳤다.
이렇게 지켜낸 조선이 300년 후에 나라를 잃게 되자, 임진·병자 양란을 이겨낸 의병정신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이 불타올랐다. 도청 정문 가일마을에는 6·10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철관에 묻혔던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의 제문이 눈시울을 적신다. 아버지 권술조 선생이 서른넷 나이에 옥사를 당한 아들에게 원통하고 절절한 가슴으로 써낸 3미터가 넘는 5,000자의 제문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국민정신으로 기억될 것이다.
KBS ‘천상의 컬렉션’ 제문의 일부, 너의 밝은 혼령은 나를 따라 왔느냐. 마루에 있느냐. 뜰에 있느냐. 어느 높은 곳으로 갔느냐. 네가 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으며 나도 너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가슴 속에 가득하다. 네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 구천에서 서로 만나는 날을 기다려다오. 마음이 아프고 붓이 더듬거려 너에게 고하는 것이니 이것이 부자간의 영결의 말이로다. 너는 혹 이 말을 듣고 나의 마음을 알려는가? 원통하고 슬프도다.
이어서 검무산 넘어 한동네에서 24명이나 독립운동에 헌신한 오미 마을이다. 가일 마을의 권오설 선생과 같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인 김재봉 조선공산당책임비서, 일본천황 궁궐에 폭탄을 던졌던 김지섭 의사,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일본 총영사를 사살하고 자결한 김만수 의사,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서 전국에 알리고 자결한 김순흠 선생 등이 모두 오미 마을 애국지사로, 이 또한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국민정신으로 기억될 것이다.
전국에서 임진·병자 양란을 극복하고 항일독립투쟁을 하였지만, 특히 경북도청 신도시는 그 정점을 찍는 역사의 중심축이며, 하회, 병산, 탈춤 등 세계문화유산도시다. 그런 만큼 하루빨리 테마별로 관광벨트를 구축하여, 2박 3일의 체류관광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회권역관광단지’를 조성해야 한다.
1,000만 관광객을 수용할 5~6개의 벨트순환기점 33만㎡(10만 평 주차장) 관광단지는, 신·구도심 균형발전과 웅도 경북을 재현 할 엄청난 성장 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