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자랑스런 내 고향, 점촌(店村)이어라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21.03.15 18:06 수정 2021.03.15 18:06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점촌시와 문경군이 통합되면서 점촌시는 머리를 감추고 문경시로 통합되었다. 당시 점촌시의원 정원 6명, 문경군의원 9명으로 점촌시가 의원수가 3명 적은 열세였다.
점촌시가 안 되고, 문경시로 된 것은 뒤떨어진 시민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향토사학자로 자처하던 S씨는 점촌이란 지명은 일제가 지은 이름으로 당연해 폐지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점촌(店村)이란 이름은 점마(점마을)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점마는 철광·금광·은점·동점 등 광산이 있거나 질그릇을 굽는 상공업중심지를 점촌(店村)이라 불렀다. 문경시 점촌동은 토기중 도자기나 토기(옹기)를 굽는 마을이 아니라 기와를 굽는 기와굴이 있는 동네라고 점마로 불렀다.
점촌에서 생산된 기와는 인근 함창에 팔려가 기와집을 많이 지었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횃불은 1970년대의 지붕개량으로부터 시작됐다.
조선 정조때의 북학자(실학자) 박제가는 연경(청나라 서울)에 다녀와서 우리나라(조선)도 이엉으로 지붕을 덮는 초가집을 개량하고, 기와집으로 해야 한다고 역설(力說)을 했지만 당시는 역설(逆說)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초가집의 단점은 해마다 이엉으로 지붕을 이어야 하고 당시 나무나 섶을 연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화재에 노출되었다. 박제가의 선견지명은 당시엔 소리 없는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고, 약 200년 세월이 지나고 나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붕개량으로 선각자의 외침이 뒤늦게나마 이루어진 것이다.
썩은 초가지붕은 뱀도 둥지를 틀고 참새도 깃들어 적과 동지가 위태롭게 공존을 했었다. 냄새가 고약한 노래기(노내 각시)도 지난날 불쾌한 추억을 되살려준다.
필자가 알기에도 점촌시내와 이웃마을에는 몇 개의 기와굴이 있었다. 오늘날 ‘문경여고’ 앞마을 이름이 재골(기와골 준말)로 큰 기와굴이 두·세개 있어, 6·25전쟁 중에는 기와굴이 피난민들의 임시거처가 되기도 했다. 기와굴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외풍이 없어 임시 살기엔 큰 불편이 없었다고 본다.
조선이 일본에게 망한 것은 열악한 무기와 병력이 열세인 점도 망국원인의 작은 부분이 될 수 있지만 상공업을 천시하고 억압하는 국가정책과 양반(성리학자)들의 뒤진 생각이 나라를 뺏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앞으로도 국가가 번영하자면 강병이 있어 국가안보가 튼실해야 하고 경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 국가산업경제를 최고도로 발전시켜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편견과 쪼잔한 생각은 수류탄을 3초내로 투척해야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는 것처럼 국가경제 운영에도 편견을 조속히 버려야 파멸을 막을 수 있다. 국가는 절로 발전하는 게 아니라 국민들의 투철한 애국심과 정치인들의 밝은 슬기가 확고해야 한다.
점촌동(店村洞)은 자랑스런 내 고향이다. 1800년대에 기와를 생산하여 지붕개량을 촉진하여, 약 200년 뒤의(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효시(첫화살)가 된 것이다.
점촌(店村)은 1830년에 펴낸 고지도에 벌써 이름이 보인다. 1924년 개설된 경북선은 점촌을 경북북부의 교통중심지로 일으켜 세웠다.

조선시대 새마을 운동요람 ‘점촌’
김시종

문경공고 뒷마을은 200여 년 전 고지도에도
마을이름이 점촌(店村)으로 적혀 있다.

기와굴이 하나 있는
점마(店村)였다.

우리는 1970년대에 지붕개량(기와지붕)이
새마을운동이라 알고 있는데,

우리 고장 점촌에는
200여 년 전에도
벌써 새마을운동이 횃불을 밝혔다.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