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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대신 붓을 든 김승옥, 말은 필요 없었다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6.07.10 18:46 수정 2016.07.10 18:46

말은 굳이 필요 없었다. 펜 대신 붓을 든 작가 김승옥(75)은 그림으로 언어를 대신했다. 산업사회의 모순과 그로 인한 상실감, 도시인의 일상 등을 섬세한 감수성고 세련된 필치로 써내려간 글 대신 여린 수채를 입은 그림 60여점으로 독자들을 만났다. 출판사 북이십일 주최로 8일 오후 대학로 혜화아트센터에서 개막한 '김승옥 무진기행 그림전'에 김 작가의 팬들이 줄을 늘어섰다. 그의 대표작 '무진기행' 등을 들고 찾아와 사인해달라는 팬들의 요청에 김 작가는 선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써내려갔다. 김승옥은 2003년 오랜 친구인 소설가 이문구(1941~2003) 별세 소식을 듣고 집을 나섰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세종대 국어국문과 교수직을 그만두고 치료에 들어가 기적처럼 병을 이겨냈으나 작가에게 절대적인 언어 능력을 잃었다. 꾸준한 재활치료를 통해 일상적인 거동을 할 수 있게 됐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단어 위주의 필담으로 한다.암흑과도 같은 뇌졸중 투병 생활 속에서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그림이었다. 시사만화가로서 활동할 정도로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투병 중에 수채화를 그리면서 풍경을 담아냈다. 서울을 비롯해 전라도와 경상도 등지를 다니며 인상 깊은 풍경을 그렸다. 2010년 순천문학관에 김승옥관이 개관하면서부터 일주일에 이삼일은 그곳에 머물면서 순천의 풍경을 그렸다. 이번 전시에는 순천만을 비롯한 전국의 풍경들을 그린 수채화와 작가의 친분이 있는 문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초상화를 소개하는 자리다. 김 작가는 사실 글보다 그림을 먼저 그렸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림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했다. 그는 "소설 쓰는 것이 직업이었지만 그림 또한 언제나 제 주변을 맴돌았다"며 "내게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전혀 별개의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김 작가가 쓴 '서울의 달빛 0장(章)'에 제1회 이상문학상(1977)을 안긴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이날 축사에서 "그의 그림 속에 다 쓰지 못한 소설의 풍경이 보인다"며 "운명은 그에게서 언어를 빼앗아갔지만 그의 점과 선과 색채의 면들을 자아내는 생의 기하학을 침범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북이십일의 함성주 기획위원의 손바닥을 통해 관람객들과 만난 김 작가는 "다행히 글쓰기와 말하기를 잠시 거두어 가신 하느님께서 감사하게도 그림 그리는 일은 허락하셨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그림을 통해 그분들과의 만남을 시도해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하얀 A4 용지에 글을 써내려갔다. "고맙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날 피아니스트 백건우·윤정희 부부, 장석주 시인 부부, 영화감독 배창호, 성우 배한성 등 100여명이 함께 했다. 이날 걸린 그림 60여점은 이미 다 팔렸다. 김 작가는 15일 추가로 20여점을 선보인다. 수익금은 김 작가의 병원비로 사용된다. 한편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생명연습'으로 등단한 김승옥은 '무진기행'을 비롯해 '서울, 1964년 겨울'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60년대 한국문학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1965년 '서울, 1964년 겨울'로 제10회 동인문학상, 1977년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을 차지하며 명실공히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섰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이후로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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