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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희 휴피부관리실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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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 관계는 생활 계약서상에서 계약 당사자를 순서대로 지칭하는 용어다. 갑(甲)‧을(乙) 등은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의 순서에 따라 비롯됐다. 계약 관계에서는 ‘갑’은 상당한 주도권이나 우위에 있는 자다. 주도권을 보다 덜 쥔 사람은 ‘을’이라고 지칭하지만, 상하 관계는 아니었다.
기업 간 거래에서 본청과 하청업체 관계, 직장에서 사측과 노측 관계, 임대계약에서는 임대인과 임차인 관계, 작은 단위든 큰 단위든 단체 속에도 직책에 따라, 상․하로 나뉜다. 이때에 ‘갑’과 ‘을’의 관계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애초엔 ‘갑·을’ 관계는 주종이나 우열, 높낮이를 구분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순서 관계를 의미했다. 수평적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나 또는 여기서 말하는 ‘갑·을’관계로 사회를 본 것이 탈이 됐다. 민주사회는 수평 관계가 기본임에도 그렇다.
IMF이후 일부 대기업에 상사와 부하 직원 간에서, 상사에게 업무 권한이 집중되는 분위기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갑·을’로 나누는 경향이 현실이 됐다. 소위 ‘을’이 ‘갑’에게 부당한 대우나, 요구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스마트폰과 SNS의 발달로 ‘갑질’ 횡포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된지 오래되었다.
내가 처음 ‘갑’과 ‘을’의 관계를 알게 된 건, 병원을 입사하며 처음 써본 근로계약서에서다. 그때 난 고용주 ‘갑’이 채용한 종업원 ‘을’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면접을 거쳐, 내가 선택받았다는 생각도 했으나, 그곳에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에서 고맙기만 했다. 직장생활에서 내가 ‘을’이여서, 힘들다고 느껴본 적도 없다.
난 ‘갑’ 과 ‘을’을 어떤 의미보단 관계로 여겼다. 어떤 사회적 관계에서는 ‘갑’이면서 ‘을’이기도, ‘을’이면서 ‘갑’이기도 한 관계도 많을 게다. 어느 중학교 교사는 학모로부터 밤낮 구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아이 잘못을 선생님께 책임을 묻는 학모들의 갑질을 나에게 하소연했다. 반대로 불만이 있어도 선생님께 건의도 못하는 ‘을’의 학부모도 있었다.
어느 동료 원장은 고객의 무리한 요구에 난감해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래도 갑과 을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으며, 서로가 ‘갑’이라고 생각하고 때론 서로가 ‘을’이라고 생각하는 관계도 있다. 어쩌면 서로가 ‘갑’이라고 생각하는 관계보다는 <서로가 ‘을’이라고 생각하는 관계서 서로 조율하고 개선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부모와 자식사이, 연인사이, 교수와 학생,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지위와 권력을 과시하고 싶은 의도가 없다할망정 구조적, 통념적, 필연적으로 갑과 을의 관계는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갑’이 되고, ‘갑질’에 가까운 권리 행사를 했다고, ‘을’의 항변을 듣는 일도 가끔 생긴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가치를 낮춰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것이 가치 저감 경향입니다” 이는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郎)는 '철학을 잊은 리더에게'서 이렇게 말했다. 이어 갑질은 자기의 열등감에서 온다. 갑질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재난이라고 평가했다.
갑질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은 열등감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관계를 이어간다면, 받아들이는 방식이 많이 달라질 거라고 소개했다. 위에 든 저서(著書)처럼 이렇듯 갑질을 현명하게 이겨내는 방법이 많이 소개되어, 갑질에 속이 상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가 구현되길 소망한다.
자신의 ‘을’이면서도 ‘갑’인양의 지위를 이용해 역(逆)으로 행패를 부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 어떤 경우이든 누구의 변화가 바람직한지는 우리는 알 수 있다.
하지만 참 어려운 문제다. ‘갑’과 ‘을’모두가 상대방의 감정을 인정하는 것부터 생활한다면, ‘갑’이 ‘을’에게 ‘역(逆)갑질’이든 ‘순갑질’이든 행패(?)를 당하는 일도 없을 게다. 이러면, 을이 일방적으로 갑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상호관계가 될 수 있다.
조금은 개인주의적이라면, 이런 갑‧을 논쟁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적당한 관계 유지가 답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배려 깊은 갑과 리더십이 강한 을이라면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하기 쉬운 사회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