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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희 휴피부관리실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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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이상이 된 자를 어른이라고 한다. ‘19금’서 벗어난다. 투표권, 자기 명의 휴대폰 개통, 은행비대면 계좌개설 등과 같은 많은 것들을 법이 허용한다. 사회가 성인됨에 도움을 준다. 게다가 일정 부분 사회생활서 자유를 누린다. 자유에 따른 의무도 진다. 난 어른이 된지 30년이 지났다. 나이만 어른이 되었지, ‘진짜 어른’이 되었을까?
오래된 사진첩을 열어보면, 지금 보다 훨씬 어린 내가 어른인 척하고 폼을 잡고 있다. 그쯤부터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 되돌아보니, 어른 된 스스로에게 살수록 자신이 없다.
뭐 그리 좋을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데, 왜 그리 어른이 되고 싶어 했을까? 하지만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세월을 어영부영하다, 어른이 되고 말았다. 막연한 기대와 설렘으로 어른이 되니, 생각지도 못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나보단 타인을 위한, 선택도 해야 했다. 점점 고민해야 하는 것들도 많아졌다. 많은 것을 양보하고, 포기도 해야 했다. 어른이기에 손해를 봤다는 느낌(?)이 들 때도 가끔 있었다.
요즘엔 나이 들수록 중심을 잡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일인지 실감한다. 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선택의 기로에 설 때도 있다. 선택에 따른 결과의 책임을 온전히 혼자서 져야 한다. 가끔 타인의 선택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앞날을 알 수 없는 미래에 오늘의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 되진 않을까?, 나쁜 영향을 주진 않았을까? 두렵기만 하다
중심을 잡는다는 건, 나의 확고한 주관이 나의 생각과 행동에 매우 중요하게 발현되는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서, 고른 상태를 의미하는 밸런스와는 조금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어느 곳에서든 나의 의견과 목소리가 무게가 있는 나이가 되었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 나의 판단과 선택이 평가 받기도 하니, 조심스럽기만 하다.
어른의 기본은 좀 막연하지만, 사회가 폭 넓게 인정하는 좋은 사람이 않을까? 내 이야기보다 타인의 이야기에 집중해서 들어줘야 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의견도 존중해 줘야 한다. 나와 다른 의견을 조율하면, 답답하고 어려운 어른이 아니라, 소통이 가능한 친구 같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게다.
20대 어른, 30대 어른, 40대 어른... 이렇게 보면, 다양한 어른이 있다. 세대에 따른 부담감이 줄어들어, 어른에 대한 책임과 평가의 기준이 달라지고 어른의 모습도 다양해진다.
소위 ‘꼰대’는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드는 어른을 말한다. 소통이 힘들고 고집스럽고 답답한 어른 같아, 참 듣고 싶지 않은 말이다. 그러다 조금만이라도 무게감을 내려놓으면, 아래도 위도 아닌, 어중간하지만 확실한 위치에서, ‘무겁고도 가벼운 어른’이 되고 말게다.
60대, 70대...들은 어른이란 꼬리표를 달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른의 수고로움이 눈에 선하다. 무한한 의무와 책임을 지고 높은 잣대로 어른다운 어른을 강요당했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 보단, 어른다워야 한다는 것들에 발목 잡혀 과연 행복했을까? 감히 행복을 꿈꾸기라도 했을까? 젊은 세대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 했을 뿐인데, 고집스럽다고 외면당한 건 아닐까?
‘어른답다’에선 어른의 정답은 없다고 본다. 어른이기 전에 단점도 있고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으로 이해하면, 서로 다른 세대를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때론 나도 이해받고, 남도 이해하며 어른다운 어른을 강요받는 것 보다, 한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조금 더 따뜻하고 깊은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