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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곤 경북과학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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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나라 장자(莊子)가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호랑나비가 된 그는 마음껏 꽃을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자신의 원래 모습인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때 장자(莊子)는 문득 떠올랐다고 한다.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됐던 것인가? 아니면 나비인 내가 지금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바로 여기서 생겨난 고사성어가 ‘나비가 된 꿈’이라는 뜻을 가진 ‘호접지몽(胡蝶之夢)’이다. 호접(胡蝶)은 ‘나비’를, 몽(夢)은 ‘꿈’이라는 뜻으로, 갈지(之)자를 뺀 호접몽(胡蝶夢)으로도 일컫는다.
우리는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곧잘 한다. 특히 정치권에서는 꼭 내가 나서야 세상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하니 내게 표를 찍어달라고 호소한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언어 자체로서는 맞는 말이지만 이치를 따지자면 틀렸다.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실제로 저절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적 측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세상 바뀜은, 사람이 살아가는 제도의 일부 변화를 말하는 것일 뿐이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인식까지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식의 변화는 오롯이 그 인식의 주체인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각에 따라 삶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호접지몽’이 그렇다. 원래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원래 나비였는데 지금의 현실에서 꿈으로 장자 본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깬 꿈이 현실인지, 또는 지금의 현실이 꾸고 있는 꿈속인지도 모른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삶을 어떻게 인식하며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적 당위성’의 개념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삶의 의미가 결정된다는 개념이다. 그런 측면에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 삶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세상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나의 시각이 어떤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것이다.
이 교훈은, 헛된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면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그런 시각은 곧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허투루 보낼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 속에 있었다고 꿈을 깬 현실을 부정해서도 안 될 것이고, 현실 속에서 나비가 된 꿈을 마냥 그리워하고 동경해서도 안 될 것이다. 꿈속에서의 나비나 현실 속에서의 자신이 다른 게 아니고 곧 하나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물아일체(物我一體)’와 상통한다. ‘나와 세상이 하나’라는 의미로, 자신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과의 구분이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세상과 그 안에 존재하는 나라는 주체는, 굳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깊게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개인의 행동이나 생각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물아일체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전체의 일부로서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이 우리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돌아옴을 강하게 암시하는 말이다. 이러한 순환과정에 대한 이해는 우리 스스로 더욱 책임감 있게 행동하게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호접지몽과 같이 장자에게서 유래된 물아일체는, 궁극적으로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호접지몽’을 최근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는 AI에 견주면 어떨까? 사람이 AI를 만들었지만, 이제 AI가 사람의 감정까지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그렇다면 AI를 만든 사람이 곧 AI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 산업혁명 시대에 등장한 기계들이, 인간을 물리적 노동에서 벗어나게 했고, 그 후 등장한 컴퓨터가 사람의 정신노동 능률을 높였다. 이제 AI가 나타나 인간만 할 수 있다고 여겨져 온 작업의 대부분을 대신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끼기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는 나쁜 것인지, 인류가 겪고 있는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좋은 것인지에 대한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예컨대, 고대의 많은 노동을 노예들이 전담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같은 ‘훌륭한 사상가’가 나올 수 있었다는 측면과, 현대적 시각에서 본다면 이들은 매우 비현실적인 말만을 앞세우는 ‘백수’였다는 주장이 그렇다. 어떤 도구가 노동의 해방을 가져오게 하면서, 그것이 철학과 인문학에 큰 발달을 가져다준 것은 분명한 공(功)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과연 모두의 삶의 가치가 높아진 것은 아니라는 점은 과(過)에 속하기 때문이다.
‘호접지몽’의 교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은,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할지, 우리의 삶에서 진정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서 어떻게 전체의 일부로서 내가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도 아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러한 사유와 이해를 통한 나의 성찰은 우리 삶을 스스로 더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게 하고, 나의 행동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게 할 것이다.
이루지 못하거나 초현실적인 꿈(夢)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하거나 소홀해서는 안 되며, 자신이 이루려는 진정한 꿈(夢,Dream)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