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귀족들이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시대에는 백성들도 3대까지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유교가 번성하면서 문중이나 권력을 과시하듯 4대 봉사로 늘리고 제물도 층층이 쌓아 올리면서 허례허식이 만연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가지각색의 ‘가가예문’이란 불명예를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공자시대의 유교가 조선 후기에 와서는 파벌과 문중에 따라 복잡한 예절로 변질되어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마라‘는 식으로 조롱거리가 된 것이다. 4색 당파마다 제례가 다르고 집집마다 ‘좌설이다, 우설이다, 조율에 시이다, 이시다’ 혼란스러우니까 각자가 알아서 지내라는 체면치레를 지어낸 것이다.
최근 들어 제사나 차례를 간소하게 지내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조상을 기리는 숭고한 본질은 간직하되 형식과 제물에 얽매인 ‘가가예문’시대는 이제는 끝내야 한다. 2500년 전 공자 시대의 유교문화가 지금의 21C 고도 문명사회에 맞게 변해야 하는 것은 온고이지신의 자연법칙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유교, 불교, 가톨릭 등 다양한 문화를 공유하고 생활하는 현대사회에서 유교문화인 제사나 차례도 본래의 조상숭배 정신을 계승하고 형식과 제물은 간소하고 자유롭게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절을 하나 기도를 하나 불공을 드리나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똑같은 것이다. AI시대에 사이버 제례도 등장하고 있는 현실이다.
2023년 중추가절을 보내면서 더 이상 명절증후군이다, 남녀불평등이다, 가가예문이다, 등의 갈등은 없애야 한다. 2024년 설날부터는 밥상같이 간소한 차례로 남녀노소 구분 없이 즐거운 가족 모임으로 지내도록 사회적 합의를 이루자. 각자가 나부터 솔선수범하여 실천을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미 상당수가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또 하나 접빈객 문화도 미덕이기는 하지만 제례 못지않게 음식 준비와 예절을 갖추는데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지금은 외식문화가 발달하였지만 과거에는 자택에서 산해진미를 구하고 요리하느라 권문세가가 아니면 융숭한 접빈객이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서민들도 검소하게나마 정성껏 손님을 맞이하는 미풍양속으로 이어왔다.
500년 전 안동에서 ’수운잡방‘이라는 조리서를 부녀자가 아닌 남자 선비가 썼다는 것은 아마도 접빈객을 위하여 121가지 음식 요리법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천 군자리에 광산 김씨 탁청정 김유 선생이 86가지(상편)를 수록하였고, 나중에 손자인 계암 김령 선생이 35가지(하편)를 추가하였다고 한다.
김유 선생은 고향에서 책을 읽고 덕을 쌓는 선비로서 부모를 봉양하고 손님을 접대(奉祭祀接賓客)하면서 선비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시인 묵객들과 교류하면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도산서원, 역동서원의 길목에서 많은 선비들이 왕래하면서 김유 선생의 탁청정에서 주식과 풍류를 즐기고 도량을 넓혔다고 한다.
200년 전에는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하면서 초가삼간을 찾은 방랑시인 김 삿갓 선생이 죽 한 그릇밖에 대접할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인 주인에게 ‘아낙네여 미안해 하지마오. 내가 이 청산과 백운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시오’라고 가슴속이 후련하게 읊었다고 한다. 곡기가 멀건 죽 그릇이다 보니 산과 구름이 거울처럼 비쳤던 것이다.
이렇게 시대와 형편에 따라 접빈객 문화는 미풍양속이 되었지만, 지금은 간단하게 차 한잔 대접하는 복잡하고 바쁜 세상이 되었다. 봉제사 또한 인륜의 근본정신이지만 형식과 제물 등을 현대사회에 맞도록 바꾸어야 한다. 역사문화나 자연생명이나 강자생존이 아니라 적자생존이 가능하다. 사라진 나라나 생물들은 변하지 못해서 멸망한 것이다.